[매거진 esc] 공유하기
지난해 여름, 서울 지하철 홍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황무지 같았던 공터가 푸른 잔디밭과 깔끔한 산책로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차가 다니던 철길을 걷어내고 공원으로 만든 겁니다. ‘경의선숲길’이란 이름이 있지만, 사람들은 ‘연트럴파크’로 부르더군요. 연남동의 ‘센트럴파크’(뉴욕)라는 뜻입니다.
더 놀라운 광경은 잔디밭의 수많은 인파였습니다. 푸른 바닥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돗자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상당수는 거기 앉아 맥주나 와인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자체로 진풍경이었습니다. 나도 다음엔 여기서 맥주 마셔볼까, 생각했습니다.
얼마 뒤, 괴로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주민이 늘었습니다. 누구는 “헬게이트가 열렸다”고 했고, 누구는 아파트에 ‘잠 좀 잡시다’라는 펼침막을 내걸었습니다. 마포구청 경의선공원 주민의견 게시판엔 심야시간대 출입 제한을 요청하는 글까지 있습니다.
공원에는 음주와 흡연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하지만 날이 풀리면서 다시 술판이 늘고 있습니다. 이곳을 관리하는 서울시 서부공원녹지사업소에 물어봤습니다. “공원에서 흡연하면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지만, 음주는 강제할 수단이 없다”고 하더군요. 법적 조항이 없어 캠페인 차원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몇년 전 뉴욕 센트럴파크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잔디밭에 누워 책 보고, 아이들과 뛰어놀고, 조깅 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어도 술 마시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도심 속 푸른 잔디밭에서 술 마시는 걸 낭만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괴로움을 주는 낭만은 결코 낭만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거기서 맥주 마실 생각을 접었습니다. 연트럴파크가 진정으로 낭만적인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서정민 esc팀장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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