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공유하기
뱃속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볼 때면 늘 달떴습니다. 눈, 코, 입, 손가락, 발가락 어느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달큰이(태명)가 딸이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습니다. ‘딸바보’가 장래희망 중 하나였거든요. 언젠가 새로 찍은 초음파 사진을 살펴보던 중 눈동자가 커졌습니다. 다리 사이로 조그마한 뭔가가 튀어나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꼬리뼈는 아닐 테고, 설마…, 고추? 의사는 대답을 흐렸습니다. 아들이 맞나 보다, 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실망감이 밀려왔습니다. 딸과 어떻게 놀까만 줄곧 상상해오던 터였습니다. 이제 상상 속에서 딸을 지우고 그 자리에 아들을 넣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아들이랑 뭐 하고 놀지? 아! 야구 캐치볼을 하면 되겠구나. 음, 또…, 목욕탕! 아들과 목욕탕에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포근해졌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번씩 나와 동생을 데리고 동네 목욕탕에 가셨습니다. 나는 탕에 들어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 “시원하다”고 하는 아버지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등을 밀어주실 땐 기분이 좋았습니다. 평소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편이었던 아버지가 그때만큼은 참으로 살갑게 느껴졌거든요.
세상에 나온 아이는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그땐 뭐여도 상관없었습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아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요. 딸바보의 꿈은 이뤘으나 목욕탕의 꿈은 포기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워터파크가 있더군요. 따뜻한 온수풀에 부녀가 몸을 담그고 장난도 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올겨울에만 벌써 두번 다녀왔는데, 또 가야겠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는 노천탕에서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우렵니다. 하늘에서 눈이라도 내린다면 더 바랄 게 있을까요.
서정민 esc팀장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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