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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면은 잡채가 아니라 ‘국수’다

등록 2016-04-06 20:48수정 2016-04-07 10:47

대전 영선사 법송 스님이 만든, 당면이 들어가지 않은 우엉잡채. 사진 박미향 기자
대전 영선사 법송 스님이 만든, 당면이 들어가지 않은 우엉잡채. 사진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국수주의자 박찬일
한국에서 당면은 곧 잡채다. 당면 삶아 놓은 걸 그냥 ‘잡채’라고 부르기도 한다. 잡채란 문자 그대로 ‘잡(雜)다하게 섞은 요리(菜)’를 뜻한다. 중국집에 가면 잡채 요리가 있다. 부추잡채, 고추잡채가 흔하다. 중국집의 잡채는 원래 당면이 중심이 아니었다. 아예 당면을 넣지 않은 것도 잡채다. 고추잡채는 피망과 고기를 길쭉하게 썰어 볶은 요리다. 당면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한국 요리에서 당면이 빠진 잡채는 성립하지 않는다. ‘잡채=당면’이기 때문이다.

당면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당(唐=중국)의 국수다. 잡채에 고명으로 넣는 것이 아니라 국수 그 자체였다. 밀가루와 메밀처럼 재료만 다를 뿐 국수의 일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잡채라는 요리에 쓰이는 하나의 재료로 격하(?)되었다.

물론 당면이 국수였다는 흔적은 남아 있다. 부산 깡통시장에 가면 된다. 본디 부평시장이다. 미군부대 캔 음식이 암거래로 팔리는 바람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국제시장 아리랑골목에도 비빔당면국수를 파는 노점이 명물이다. 입구의 높은 건물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아주 장관이다. 비빔당면 만드는 ‘아지매’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골목의 비빔당면집들은 매일 가설시장처럼 운영되고, 저녁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조리대 자체가 바퀴를 단 이동형이다. 몇가지 간단한 채소를 넣어 비벼 먹는 이 국수는 매끄러워서 후룩후룩, 금세 바닥을 비우게 된다. 목으로 국수를 삼키면서 쾌감을 얻는 방식이다. 다만 기름 먹은 당면이 미끄러워서 국수처럼 한 젓갈 두툼하게 말아 넣는 것이 아니다. 그릇째 입에 대고 젓가락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것이 아리랑골목의 비빔당면을 제대로 먹는 법이다.

중국에서 당면은 국수의 일종이다. 잡채에 넣는 재료가 아니다. 당면이란 말은 물 건너인 우리나라에서 붙인 이름이다. 당연히 그들은 다르게 부른다. ‘펀쓰’(粉絲)다. 실처럼 가는 면이란 의미다. 서울 대림동이나 외국식품상에서 살 수 있다. 한국 당면은 주로 고구마 계열의 전분으로 만든다. 중국 펀쓰는 좀 다르다. 녹두 같은 콩 종류를 쓴다.

이탈리아의 중국집에 가면 이 당면 요리를 판다. 간장으로 볶아 내온다. 한국의 잡채와 흡사하다. 이탈리아에 머물 때 한식이 그리우면 대용품으로 많이 먹었다. 이탈리아식 이름이 ‘콩 스파게티’(Spaghetti di Soia)다. 콩? 알고 보니, 바로 녹두를 쓴다는 뜻이었다. 당면은 곧 녹두로 만든 중국식 국수인 셈이다. 일본도 당면을 먹는다. 이름이 ‘하루사메’(春雨)다. 봄비처럼 가늘다는 뜻이다. 제법 운치 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쓴 가장 오래된 한글요리서인 <음식디미방>에는 잡채가 등장한다. 장계향 선생이 저자다. 후손인 종부께서 책에 나온 대로 잡채를 만드는 걸 본 적이 있다. 온갖 재료와 고명으로 맛을 냈다. 그런데 당면은 들어가지 않았다. 언제부터 당면이 주가 되는 잡채 요리가 만들어졌을까. 기록으로는 1924년 <조선요리제법>이라고 한다. 1930년대 신문을 검색하면 한 기사가 뜬다. 여학교 요리 선생님의 기고문이다. 잡채에 당면을 넣는 조리법이다. “당면은 물에 불려 푸러지지 않게 살짝 데처 건저놀 것”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미나리, 시금치, 석이와 목이, 고기, 표고와 계란이 들어가는 것이 현대의 잡채와 같다. 이제 당면은 만두, 순대 등 온갖 요리에 들어가는 만능 재료가 되었다. 그래도 당면의 정체성은 국수다. 미안하다, 당면.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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