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경상도 대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른바 ‘종로’(대구도 종로가 있다)의 화교 문화를 취재했다. 대구도 화교 인구가 줄고, 전통 문화를 지켜내기에는 힘겨워 보였다. 화교가 운영하고 요리하는 중식당도 많이 줄었다. ‘군방각’ 같은 크고 호화로운 중식당이 있던 시절이 있었으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영생덕’이라는 화교 중식당이 아직 성업하고 있어 찾았다. 지금은 팔지 않는 역사적인 메뉴 몇 가지를 구경했다. ‘팔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인의 구미에 더 이상 맞지 않아 도태된 메뉴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간반몐(乾拌麵·건반면)이다. 날씨가 더워지면먹는 일종의 중국 냉면이다. 말린 해삼이나 오징어, 새우 같은 해산물이 고명이고 뻑뻑한 소스에 비벼낸다. 땅콩소스다. 특별히 중요한 고명이 있다.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가죽나물이다. 쌉쌀하고 콤콤한 맛이다. 이 면의 역사를 기억하는 화교들은 가죽나물이 들어가야 진짜 간반몐이라 말한다.
요즘 중식당에서 파는 냉면은 일종의 한국화 버전이다. 시원한 육수의 한국 냉면과 경쟁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면이다. 어떤 이는 한국형 중국 냉면은 일본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본 나가사키 등의 화교 집단 주거지역에서 냉면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한국에서는 누가 처음 이 냉면을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땅콩소스는 여전히 사용되어 이 면이 간반몐에서 힌트를 얻은 일종의 변종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한국에 사는 화교의 본고장인 중국 산둥은 땅콩이 많다.
낙화생 기름도 많이 썼다. 낙화생이 바로 땅콩의 중국어다. 비빌 때 땅콩소스가 들어가면 고소한 맛이 면 전체의 맛을 올려준다. 어떻게 보면 짜장면과도 닮아 있다.
간반몐 말고도 더운 여름에 먹는 면이 있다. 량몐 또는 량반몐(사진)이다. 여기서 ‘반’은 비빈다는 뜻이다. 량(凉)은 서늘하다는 의미이므로, 한국의 냉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본토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차가울 정도는 아니다. 그야말로 서늘한 정도의 온도다. 중국요리가 그렇듯 기름을 많이 넣어 버무린다. 볶는 것은 아니니, 여름에 어울린다. 몸을 식혀주는 오이를 듬뿍 넣어 낸다. 오이는 중국식 짜장면에도 대개 넣는데, 이는 짜장면이 여름 음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한국의 짜장면에 오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전통이 이어진 것인 셈이
다. 흥미로운 것은, 본토에서도 땅콩소스에 버무려주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땅콩소스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미군부대의 피넛버터가 대체했다. 지금도 땅콩소스를 만들어 쓰는 집은 거의 없다. 피넛버터가 ‘원조 레시피’가 된 까닭이다.
‘신화교’가 대거 몰려 사는 서울 대림동 중국인 거리의 식당에서 량반몐을 먹을 수 있다. 피넛버터와 땅콩소스는 들어 있지 않다. 임오군란으로 말미암아 화교가 한반도로 유입되고,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미군이 주둔하기에 이른다. 미군 상징물의 하나인 피넛버터가 화교의 음식에 쓰일 줄이야. 다시 본토에서 온 ‘신화교’가 만들어내는 량반몐에는 들어가지 않는 피넛버터. 량반몐 한 그릇에서 변하는 세계 질서를 보게 되는 것일까.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