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취향을 고려해 편지지를 고르고, 누군가와의 추억을 끄집어내어 글을 써본 적이 언제였던가. 올 가을 그동안 소홀했던 나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 한 통 써보자.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무더위가 지나간 자리에 그리움이 들어왔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란 노래가 입가에 맴돈다. 바람이 온몸을 스칠 때면 바쁜 일상에 잊고 살았던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길가에 뒹구는 낙엽이 시야에 들어올 때면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잊히는 존재가 되어 있지 않은가 불안감이 엄습한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나를 성찰하고, 내 주변을 반추해보는 그런 기회의 나날들. 오죽하면 가을을 ‘사색의 계절’이라 할까. 내 소중한 인연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내 존재가 소중한 이들에게서 잊히지 않기 위해 손편지를 쓰기에 적합한 계절이다.
왜 카카오톡이나 텔레그램이 아니라 ‘손편지’냐고? 편지만큼 짜릿한 감동과 메시지를 주는 도구는 없다. 즉흥적인 감정을 실시간으로 토해내는 에스엔에스(SNS) 대화는 감흥도 여운도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생각해보라. 우리 일상에서 누군가를 온전히 생각할 때는 편지를 쓸 때뿐이다.
더구나 종이에 펜으로 꾹꾹 눌러쓴 손편지는, 누군가의 취향을 고려해 편지지를 고르는 순간부터 시작해 세월이 지날수록 더 묵직한 감동과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편지지와 손글씨는, 읽는 사람에게 쓴 사람의 체취까지 전달해준다. 시간이 흐르며 바래진 편지지와 번져나간 펜의 흔적은 ‘그때 그시절’의 추억을 타임캡슐 밖으로 불러내는 동시에, 지금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결혼을 앞둔 연인들이 손편지로 사랑을 확인하고 프러포즈를 하는 것도, 결혼식장에서 배우자에게 손으로 쓴 편지를 낭독하는 게 무엇 때문이겠는가. 2년 전 동영상 협박 편지 논란에 휩싸였던 이병헌, 얼마 전 전범기 논란에 휩싸인 티파니가 사죄의 도구로 손편지를 쓴 것도, ‘진심’을 담아내기에 손편지만한 게 없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손편지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직장인 이아무개(40)씨는 “얼마 전 장인어른께서 생신을 앞두고 ‘선물은 필요 없고 손편지를 받겠다’고 선언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씨는 “아내와 처남·처제들이 각자 ‘부모님께 고맙다. 건강하시라’는 내용의 손편지를 써서 드렸는데, 장인어른께서 ‘자식들과 늘 카톡으로 얘기를 나누지만 손글씨를 보니 느낌이 다르다. 가슴이 뭉클하다’며 무척 기뻐하셨다”고 했다. 30대 직장인 고아림(가명)씨는 “좋을 때든 나쁠 때든, 길든 짧든 손편지를 자주 쓰는 남자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찰스 다윈은 1만5천여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이 가운데 그의 삶과 연구 과정을 생생히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묶여 <기원>과 <진화>라는 서간집으로 나왔다. 조르주 상드의 편지 1만8천통은 <편지 1~6>으로 부활해 시대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서간집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전하고 싶다면 종이를 펼쳐 편지를 써 보는 건 어떨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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