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공덕동의 한 중국집. 주인이 수타면을 뽑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수타면은 두말할 것 없이 중국 산둥성 출신 요리사들의 솜씨다. 지금은 중국 북방 지역, 특히 란저우(蘭州) 쪽에 수타면이 흥한데 그래도 여러 연구에 의하면 원조는 산둥성이다. 화교, 특히 대구 화교사에 밝은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의 글에도 수타면은 산둥성 출신 화교의 독보적인 솜씨라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 때 작가 송후의 저서 <송씨양생부>에 산둥성 푸산(福山)현에서 발명되었다고 쓰여 있다는 것이다. 수타면 또는 푸산대면이라고 불렀고 명과 청나라 궁중요리사의 상당수가 산둥, 그중에서도 푸산 출신이었다고 한다.
산둥 사람들이 우리 화교의 원조가 된 것은 다들 아는 내용이다. 그중에서도 수타면 기술자는 푸산 사람들이었다. 아서원과 함께 전설적인 요릿집이었던 서울의 태화관, 인천의 중화루(현 파라다이스호텔 자리), 대구의 전설적인 중국요릿집 군방각도 모두 푸산 사람들이 경영했다고 한다. 수타면은 중국요리의 중요한 기술이었고, 비전(祕傳)하는 노하우였다.
이탈리아의 섬 사르데냐에는 이 수타면과 아주 비슷한 면이 있다. ‘수 필린데우’(su filindeu)라고 일컬으며, 소수의 이수자들만 만들고 있다. 만드는 방법은 우리나라 화교의 수타면과 비슷하다. 면을 치대어 글루텐을 활성화한 후 배로 늘려가 4, 8, 16, 32, 64, 128, 256가닥까지 만들어간다. 밀가루는 지역 고유의 경질밀인 듀럼을 쓰고 소금과 물만 넣는다. 이 기술이 언제 전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 드넓은 ‘파스타 천국’인 이탈리아에서도 섬인 사르데냐에서만 극히 일부 살아남았다.
그에 비해 우리의 수타면은 우여곡절 끝에 상당히 많은 기술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한데 전통적인 화교들 사이에서는 거의 대가 끊기고, 오히려 한국인 요리사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젊은 화교들이 대를 잇지 않은 까닭이 있다. 본토의 중국(오랫동안 우리가 중공이라고 불렀던)과 수교하면서 무역 등 다른 일자리가 많아져 옮겨 갔고, 무엇보다 대우받지 못하는 요리사 일을 자식들에게 권하지 않았다. 차별이 적은 약사나 한의사 같은 전문직으로 가길 바랐다. 이런 분위기에서 2000년 이후 건너온 중국 본토 요리사들이 수타면 세계의 틈을 메우기 시작했다.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는 서울 대림동과 건대 앞 조양시장에 본토 수타면 집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림동의 수타면 집은 한번 이 면에 소개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조양시장 쪽이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된 짜장면도 있고, 무엇보다 정통 란저우식 수타면 요리가 맛있다. 흥미롭게도 가게 이름이 ‘미국가주우육면대왕’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식 우육면을 판다는 뜻이다. 이 상호의 가게는 경기 김포·수원과 서울 대림동 등에도 있다. 속사정은 모르겠는데, 조금씩 간판 모양이 다르다. 원조가 어딘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가게의 주력 면은 우육탕면. ‘뉴러우틦’이다. 소고기로 국물을 냈고 큼직한 고기가 들어 있다. 수타면을 말아내는데 아주 맛이 좋다.
이 면을 대하자 참 오래전의 기억이 돌아왔다. 우리가 중국과 갓 수교했던 1993년. 당시 중국은 수교는 했지만 적성국이었다. 취재 겸 여행차 중국에 갔다. 가기 전에 강남 어디선가 ‘적성국 방문자 교육’을 했다. 안기부(현 국정원)의 교육이었다. 북한 사람 조심하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때 나는 중국 시장에서 2000원인가 주고 허름한 대중복을 사서 입고 돌아다녔다. 그래도 외국인 태가 났다.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도인 베이징에도 노인들이 돋보기 쓴 것 말고는 근시용 안경 쓴 이가 드물었다. 거리에는 자전거들이 빼곡했고, 자동차는 거의 없었다. 당연히 공기가 아주 맑았다. 아침에 우리 돈으로 2000원 들고 나가면 버스 타고, 식사 두 끼에 맥주 몇 병을 마시고 담배 한 갑 사고도 남았다.
베이징대학교 앞의 허름한 국숫집에 들어갔다. 우육탕면이 있었다. 인민폐로 2위안. 대략 300원 정도. 양이 얼마나 많은지 대식가인 내가 남겼다. 엄청난 양의 쇠고기가 들어 있었고, 진하고 검은 국물이 맛있었다. 그때 주방이랄 것도 없이 다 보이는 데서 면을 치던 어린 소년 수타 요리사가 지금도 생각난다. 제 몸집만큼 큰 밀가루 덩어리와 씨름하던 마르고 작았던 그 소년은 이제 노련한 요리가 되었겠지.
대림동이든 조양시장이든 수타 우육탕면 간판이 보이거든 한 그릇 하고 가시라. 그 진하고 검은 마성의 국물, 손으로 친 불균일한 면의 매력이 거기 있다.
박찬일/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