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그로브의 ‘초리소를 품은 가지’. 백문영 제공
바람에 코끝이 시리다. 슬슬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계절이다. 올해는 도대체 뭘 하고 살았지? 후회부터 앞선다. 그렇게 먹고 마셨는데도 여전히 못 가본, 미치도록 가보고 싶은 레스토랑이 한가득하다. 주로 서울 청담동과 압구정동, 신사동과 한남동만을 퐁당퐁당 뛰어다닌 바람에 ‘전통의 미식 강자’ 방배동 서래마을과는 여전히 낯가리는 사이다. ‘오늘로써 격조한 사이는 끝이다’ 결심을 하고 택시에 올랐다.
‘아메리칸 컨템퍼러리 다이닝’을 내세우는 ‘그로브’는 서래마을 주택가에 있다. 콕 박혀 있어서 갈 때마다 보물찾기 하듯 헤매게 된다. 그럴 땐 유명한 프리미엄 수제 버거 전문점 ‘어니스트 버거’를 찾으면 된다. 그로브는 어니스트 버거가 있는 건물 2층에 있다. ‘서래마을 터줏대감’이라 불렸던 레스토랑 ‘줄라이’의 김형준 셰프와 이현재 매니저가 합심해 꾸몄다. 캐주얼 다이닝을 표방하는 만큼 식재료도 조리법도 한껏 젊은 층의 취향에 맞게 자유롭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메뉴들이다.
도착하자마자 적당히 식힌 스파클링 와인 한 모금으로 시작했다. 애피타이저로는 ‘토마토마토마토마토’를 골랐다. 이 메뉴는 올리브유에 넣어 맛을 낸 대저 토마토, 그릴로 구운 대추 토마토, 튀긴 토마토와 방울토마토까지 4가지 종류의 토마토를 각기 다르게 조리한 뒤 크림치즈를 뿌린 샐러드다. 맛도 이름도 톡톡 튄다. 입맛이 한껏 돌기 시작했다. 짭조름한 초리소를 반 가른 가지에 넣고 말아 낸 ‘초리소를 품은 가지’를 이어 주문했다. 부드러운 가지와 쫄깃한 초리소가 환상적인 식감으로 어울려 춤을 췄다. 메인 요리로는 ‘12시간 조리한 소갈비’를 골랐다. 12시간 동안 저온 조리한 소갈비에는 버터와 레드 와인, 허브의 풍미가 어우러져 있다. 칼로 자르지 않아도 결대로 찢어진다. 그 부드러운 촉감 덕에 먹기 전부터 기분이 좋다. 갈비찜도, 뵈프 부르기뇽(프랑스 쇠고기스튜)도 떠오르는 친숙한 맛이다. 디저트로는 ‘오레오 치즈케이크’를 골랐다. 진득한 치즈케이크에 ‘오레오 쿠키 크럼블’을 잔뜩 뿌리고 오렌지크림과 꿀을 얹었다. 달고 고소하고 새콤한 맛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늘은 높고 사람은 살찌는 가을, 긴 명절도 끝났고 잔치도 끝났다. 하지만 서래마을에는 이렇게 좋은 식당, 이토록 풍요로운 음식 코스가 있다. ‘역시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대신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술을 찾아 헤매는 게 훨씬 남는 장사야.’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이렇게, 또다시 자신을 속여 본다.
<럭셔리> 라이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