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풀 냄새, 나무 냄새를 맡기 좋은 가을에는 산에 오른다. 청계산도, 도봉산도 좋지만 나는 남산이 더 좋다. 완만한 경사, 차분하게 깔린 등산로 덕에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이 정도 걸었으면 됐다’ 싶으면 중턱에 자리잡은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호텔로 향한다. 요새에 들어선 듯 ‘비밀스러운’ 느낌이 좋다. 또 이 호텔에는 ‘컨템퍼러리 한식 다이닝’이라는 다소 생소한 콘셉트의 레스토랑인 ‘페스타 다이닝’이 있다. 전통의 옷을 입은 한식을 정갈하고 먹기 좋은 형태로 구성했다. 현대적인 요소들도 가미했다. 각종 티브이(TV)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스타 셰프’ 강레오가 총괄한다.
며칠 전 이 레스토랑을 찾아 ‘한식엔 로제 샴페인이지’ 거들먹거리며 ‘모에테샹동 로제’ 샴페인을 주문하고 사전처럼 두꺼운 메뉴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먹고 싶은 거 다 주문해보자’라고 생각했다가 비루한 위장과 허름한 지갑 사정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서 다른 곳에선 먹을 수 없는 메뉴를 고르자는 마음으로 ‘삼치 볏짚 훈연 회’, ‘남산 한우 편채와 해남 곱창김’을 주문했다. 음식을 먹기도 전에 놋으로 만든 정갈한 커틀러리(식사용 기구인 나이프, 포크, 스푼 등의 총칭), 은은한 녹색 빛의 테이블보,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는 놋 식기에 눈길을 빼앗겼다. 전통 방짜 유기 브랜드 ‘놋이’와 세련된 식기로 명성 높은 ‘정소영의 식기장’의 그릇을 사용한다는 호텔리어의 설명이 뒤따랐다. 첫번째로 나온 음식은 ‘삼치 볏짚 훈연 회’. 쉽게 상하는데다 살이 물러 산지가 아니면 먹기 힘든 삼치회를 볏짚을 태워 훈연해 맛을 냈다. 지방이 한껏 오른 삼치 살에 은은하고 구수한 볏짚 향이 묻어 기름지고 고소한 맛이 폭발했다. 식욕이 돋아 샴페인 한잔을 ‘원 샷’ 하고 ‘남산 한우 편채와 해남 곱창김’을 맛봤다. 구불구불한 곱창을 닮은 곱창김에 얇게 자른 한우를 말아 한입에 먹는 음식으로, 바삭한 김과 부드러운 한우의 식감이 환상적이다. 다른 곳에서 먹기 힘든 걸 선택해 호사를 누리자 익숙하고 친근한 먹을거리가 한없이 그리워졌다. 그때 ‘산 5-5 골동 반상’(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비빔밥을 뜻하는 ‘골동반’에 호텔의 주소 ‘산 5-5’를 붙여 탄생한 이름이 웃음을 짓게 했다. 골동반, 비빔장, 국과 반찬 등이 고급스러운 소반에 나왔는데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 비빔밥은 12가지의 나물을 잘게 다져 모자이크하듯 동그랗게 모아 만들었다. 아름다워서 먹기에 아까울 정도였다. ‘이건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해’ 생각하며 음식 위에서 한 장, 정면에서도 한 장 촬영하고 비벼 먹었다. 토마토와 고추장을 섞어 만든 토마토 양념장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옅은 단맛이 매력적이었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한 끼 때우는’ 식사 대신 이런 여유를 부리는 날도 있어야 행복이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주 오는 미식이 아니었다. 취기 때문인지 뱃속을 한가득 채운 좋은 음식 때문인지 슬며시 웃게 되는 오후였다. 운동화 끈을 다시 동여매고 하산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토록 좋은 음식을, 자연을 서울에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백문영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에디터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호텔의 ‘산 5-5 골동 반상’. 호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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