홑겹 니트만 입고 발목은 다 드러낸 채 온 거리를 휘젓고 다녔던 것이 언제인가 싶다. 매일 영하권을 기록하는 추위로 뺨 때리는 듯한 칼바람이 무서울 지경이다. 2017년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스마트폰 속 ‘단톡방’은 가장 현실적인 척도다. 송년회를 하자는 단톡방이 일주일 만에 10개가 생겼다. 이번 주도 다음 주도 다다음 주도 술 약속과 밥 약속, 커피 약속으로 가득 찼다. ‘우리 연말인데 만나야지’ 기계적으로 묻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스케줄을 받아 적다 보니 정작 정말 소중한 이와의 약속은 뒷전이 됐다.
인생에서 진짜 소중한 건 뭘까? 내 인맥을 넓혀주는 관계가 아니라 나를 늘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친구가 아닐까. 그래서 가까운 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한 주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분연히 단톡방을 떨쳐냈다.
그리고 소중한 친구에게 연락해 강남구 신사동의 ‘미라이’를 찾았다. 정신없고 취한 이들로 가득한 먹자골목 가로수길에서 한발짝 떨어진 신사동 작은 골목에 있다. 조용한 곳이다.
‘미래’라는 뜻의 상호가 무슨 뜻인가 잠시 생각하다 굳게 닫혀 있는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시원하게 넓은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바 테이블이었다. 칵테일 바도 아니고, 스시 전문점도 아닌데 이런 형태의 바 테이블을 사용한 것은 재료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이 아닐까? 바 테이블에 앉자마자 아삭한 오이, 새콤한 유자소스와 향긋한 굴을 섞은 기본안주 ‘오토시’가 나왔다. 일본 위스키 가쿠빈과 토닉 워터를 섞은 ‘가쿠빈 하이볼’을 주문하니 차갑게 얼린 주석 잔에 얼음을 가득 넣은 술이 등장했다. 오이 한 입, 굴 한 점을 입안에 넣고 옆자리 사람들이 무엇을 고르는지 눈치를 살폈다. 그들이 주문한 메뉴는 ‘이카 낫토’와 ‘마구로 슈토아에’. 맛있어 보여 따라 주문했다.
제주산 한치와 낫토, 성게 알을 섞어 만든 이카 낫토는 낫토의 큼큼한 맛과 한치의 쫄깃한 식감이 잘 어우러진 맛이었다. 흰 살 생선과 참치 등살을 참치 내장 젓갈에 비벼 먹는 마구로 슈토아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장 특유의 비릿한 향이 가득 올라올 때, 빳빳한 부산 기장산 김에 싸 먹으면 풍미가 더욱 강렬해진다. 두 명이 함께 가볍게 먹기 좋은, 야박하지 않은 적당한 양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때가 있다. 바쁘다는 이유로, 만날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익숙하고 편한 이를 뒷전에 두기도 했다. 단톡방 속의 관계를 살피느라 정작 소중한 관계는 미지근하게 유지했다는 미안함에 참치 등살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 그의 입에 넣었다. 미래에도 함께 먹고 마시고 사랑하자고 다짐하며 짭조름해진 입을 하이볼로 헹궈내고 생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