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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새벽 1시50분 사라진 그녀···시신으로 - 노들길 살인 사건

등록 2018-04-04 20:42수정 2018-05-15 15:00

[ESC] 조수진의 미제사건 노트

성산대교.  <한겨레> 자료사진. 그래픽 이경희 modakid@hani.co.kr
성산대교. <한겨레> 자료사진. 그래픽 이경희 modakid@hani.co.kr

2006년 7월, 나는 <한국방송>(KBS)에서 <낭독의 발견>을 제작하고 있었다. 음악과 문학과 예술을 얘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김진영(가명, 당시 23살)씨의 죽음에 대해 들은 날은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출연을 앞두고 있던 가수 이적씨와 사전 미팅을 마치고 돌아가던 저녁, 집 근처에서 친구와 마주쳤다. 친구는 소문을 들었느냐며 도시괴담이라도 전하듯 미간을 찌푸린 채 얘기했다. 우리가 함께 간 적 있는 근처 주점에서 술을 마신 뒤 실종됐던 20대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이적씨가 갓 발표한 ‘다행이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아내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라고 했다. 이적씨와 헤어진 뒤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라는 노랫말을 기분 좋게 곱씹으며 걷다 전해 들은 죽음이라 더 충격적이었고 선명하게 머릿속에 각인됐다.

취업 준비하던 23살 여성
노들길에서 시신으로 발견

그 뒤로 이런저런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소문으로 들었던 그 사건이 ‘노들길 살인사건’으로 불리고 있으며 범인이 잡히지 않아 미제사건으로 남았다는 걸 알게 됐다. 진영씨는 취업 준비를 위해 서울에 올라온 지 4개월째였던 스물세살의 젊은이였고,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빨리 도움을 주고 싶어 휴대전화까지 정지시키고 공부에 매달렸던 성실한 딸이라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그런데 두툼한 조사자료 속에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곤 얼어붙었다. 서울 성산대교 남단 노들길 배수로에서 발견된 진영씨는 알몸인 상태였다. 게다가 범인은 시신의 양쪽 팔을 가슴에 모으고 양쪽 다리를 벌려둔 채 유기했다. 그리고 음모를 면도한 뒤, 코와 성기에 휴지를 밀어넣었다. 마치 내가 당한 것 같은 극도의 모욕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현기증마저 났고, 동시에 표현하기 힘든 분노가 몰려왔다. 그 사진 한장을 앞에 둔 채 한참이나 눈을 감고 진정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이후 노들길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진영씨가 떠오른다.

진영씨는 2006년 7월3일 새벽 1시50분 무렵 실종됐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와 술을 마신 뒤 한강에 함께 가기로 한 진영씨는 택시가 지하철 당산역 6번 출구에 멈췄을 때, 채 멈추지 않은 택시에서 뛰어내려 한강 쪽으로 달려갔다. 평소에 술을 그리 즐기지는 않았지만 그날은 오랜만에 만취한 상태였다고 친구는 전했다. 따라 내려 골목을 이리저리 뒤지던 친구는 얼마 뒤 한 건물 입구에 기대 있는 진영씨를 찾아냈지만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달려서 사라졌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날이 밝은 뒤에도 진영씨로부터 연락이 없자 진영씨 부친은 즉시 실종신고를 했다. 평소 외박과는 거리가 한참 먼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영씨가 다시 발견된 건 실종 뒤 24시간이 지난 7월4일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새벽 운행 중이던 택시기사가 볼일을 보기 위해 정차했다가 ‘배수로에 시신으로 보이는 하얀 물체가 있다’며 신고한 것이다.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였다. 시신의 목에선 끈으로 조른 흔적과 손으로 조른 흔적이 모두 발견됐다. 실종 당시 진영씨는 만취 상태였는데, 발견된 시신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였다. 위장에 음식물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술이 모두 깨고 음식물이 모두 소화될 때까지 살아 있었단 뜻이었다. 발견 당시 측정한 시신의 체온으로 미뤄 진영씨는 실종 뒤에도 최소 21시간 동안 생존해 있었던 걸로 추정됐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을지 짐작하게 하는 증거들이 시신에서 발견됐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는 오른쪽 손등에 남은 동그란 상처를 ‘열 손상’, 그중에서도 담뱃불이나 차량용 라이터에 의한 것으로 추정했다. 특정 부위(차마 밝힐 수 없다)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치흔(이빨자국)이, 항문에서는 소량의 정액반응이, 귓불에서는 범인의 유전자가 발견됐다. 또 손목에선 끈으로 묶었던 흔적이 발견됐다. 체내에선 약물 성분이나 알코올 성분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여러 프로파일러들은 진영씨가 살해당하기 직전까지 ‘맨정신’으로 ‘항거불능 상태’에서 고통받았을 것이라 분석했다.

경찰은 진영씨가 실종된 당산역을 중심으로 탐문에 나섰다. 그리고 진영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지점에서 130m쯤 떨어진 곳의 노인정 옆 기념비에서 여성용 셔츠와 속옷, 가방과 신발을 발견했다. 실종 직전 친구가 찍은 사진 속 진영씨의 옷차림과 일치했다. 기념비 뒤쪽의 풀이 훼손된 모양도 거기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거란 짐작을 뒷받침했다. 진영씨는 그곳에서 어떤 일을 당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근처는 오래된 주택가로 시시티브이(CCTV)가 전혀 없어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했다.

범인 이빨자국 등 참혹한 현장
목격자 ‘법 최면’ 통해 용의자 추적

대신 목격자는 여럿 등장했다. 7월3일 새벽, 당산역 4번 출구 쪽에서 작업하던 환경미화원이 상의를 벗은 채 달려가는 젊은 여성을 봤다고 진술했다. 같은 날 새벽, 진영씨가 사라진 지점 근처 연립주택에 살던 고등학생은 창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내다보자 두 명의 남성이 한 여성을 붙잡은 채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남성들은 여성을 억지로 끌고 가려 했고, 여성은 거부하면서 큰 소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이 중 경찰이 가장 무게를 둔 것은 고등학생의 목격담이었다. 고등학생이 살던 집이 진영씨가 사라진 길 근처였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동의를 구하고 ‘법 최면’을 실시했다. 그리고 새로운 진술을 확보했다. 당시 실랑이를 벌이던 남성들 옆에 보라색 ‘유로 엑센트’ 차량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 번호판에는 ‘인천’이라고 적혀 있었고 네 자리 숫자 중 2와 8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경찰은 5천대가량의 유로 엑센트 소유주를 파악한 뒤 유전자를 채취, 시신에서 발견한 범인의 유전자와 대조했지만 일치하는 인물은 없었다.

또 다른 목격자도 등장했다. 7월4일 새벽 12시30분 무렵 노들길을 지나던 견인차 기사였다. 도로변에 어두운색의 ‘아반떼 엑스디’ 차량이 서 있어서 유심히 살펴봤다는 것. 고장 차량은 아닌 것 같아 곧 지나쳤지만, 서행하는 동안 차량 속의 남성 한 사람과 도로변에 서 있던 남성을 봤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견인차 기사에게 법 최면을 실시해 번호판의 마지막 숫자가 8 혹은 9였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견인차 기사가 두 남성을 봤다고 진술한 지점에서는 실제로 2시간 뒤 진영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러나 이 진술로도 결국 용의자를 찾아낼 수는 없었고 사건은 고착상태에 빠졌다.

잠시 실마리를 찾나 싶은 순간도 있었다. 2012년 3월, 영등포경찰서 강력팀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노들길 살인사건 담당팀’을 찾은 남성은 경찰이 사건 직후 고등학생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 배포한 몽타주를 언급했다. 그는 범인이 몽타주 속 얼굴과 비슷하게는 생겼으나 키는 5㎝ 정도 작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경찰은 급히 발신지를 추적했지만, 그곳은 강북구 번동의 한 아파트에 있는 공중전화로 주변에 시시티브이가 없는 곳이었다. 혹시 장난 전화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러 프로파일러들은 장난 전화라고 보기엔 그가 전화로 얘기한 내용이 몹시 구체적이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경찰서 강력반에 장난 전화를 거는 일은 흔치 않다는 것.

2017년 서울지방경찰청은 노들길 사건을 원점에서 다시 분석하기로 하고 다섯명의 프로파일러가 참여하는 행동과학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시신 유기 지점에 주목했다. 노들길은 시간당 800여대의 차량이 빠른 속도로 지나는 곳이다. 게다가 유기 지점은 교각 가까이에 있어서 빠르게 지나가는 차 안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또 사건 당시는 여름이라 풀이 많이 자란 상태였다. 다시 말해 시신 유기 지점은 우연히 발견한 장소가 아니라 범인이 이미 알고 있던 장소라는 뜻. 이런 곳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범인은 어떤 사람일까.

경찰은 고등학생 목격자가 봤다는 차량의 모습에서 특이점을 찾았다. ‘스포츠카 같은 덮개가 있었고 아래쪽에서 불이 번쩍였다’는 진술이었다. 그렇다면 튜닝을 한 차량일 가능성이 컸다. 튜닝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자 2006년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카폭’(자동차 폭주족) 차량일 수도 있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당시 ‘카폭’들이 선호하던 차량이 아반떼와 엑센트였는데, 속도감을 즐길 수 있는 소형 차량으로 주머니가 가벼워도 할부로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는 것.

제보자 전화로 몽타주 수정
튜닝 차 몬 두 남자가 범인

그리고 이들이 2006년 당시 주로 모이던 장소 중 하나가 바로 노들길 옆 토끼굴이었다는 것이다. 인근 주민들도 2006년 무렵 유독 머플러(자동차 소음기)를 개조한 카폭 차량들이 몰려다니며 밤잠을 설치게 했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고등학생이 목격한 차량이 엑센트였고 견인차 기사가 목격한 차량이 아반떼였다는 점에서 2인조의 범인이 납치할 때는 엑센트, 유기할 때는 아반떼 차량을 이용했던 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범인(들)은 스물세살의 여성을 납치해서 하루 동안 성적으로 학대하고 살해한 뒤, 시신마저 모욕했다. 그리고 치욕적인 모습으로 유기했다.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의 끝은 어딘가 생각한다. 그리고 아득해진다. 어떤 날엔 진영씨가 극도의 공포를 느꼈을 마지막 하루를 상상해본다. 그러나 그 고통은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요즘에도 출근길이면 어김없이 노들길을 지나게 된다. 천천히 푸른 잎이 돋는 모습을 보며 진영씨를 떠올린다. 절대로 그 죽음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수진(방송작가)

※ 이 사건과 관련한 정보가 있으신 분은 서울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 수사팀(010-7489-0650)에 제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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