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한겨레> 자료 사진. 그래픽 이경희 기자 modakid@hani.co.kr
2005년 6월16일 목요일, 아파트 단지를 돌며 전단지를 붙이던 청소업체 직원 정재영(가명)씨는 성북구 돈암동의 한 미입주 아파트를 찾았다. 현관문에 전단지를 붙이면 관리사무실이나 타 업체에서 금세 떼어버리니 집 안으로 들어가 붙박이장이며 화장실 문에까지 여러 장을 붙여야 한다는 게 정씨가 업체로부터 전달받은 원칙이었다. 당시엔 꽤 많은 가구가 입주 전이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마무리 공사 때문에, 가구 대다수 현관문이 잠기지 않은 상태거나, 잠겼더라도 비밀번호는 ‘0000’ 혹은 ‘1234’ 등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씨는 중간층의 한 집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전엔 맡아보지 못했던 낯선 악취가 새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정씨가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문은 금세 열렸다. 그러나 정씨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현관 밖에서 맡았던 악취가 집안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갈까도 생각했지만 심상찮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는 생각에 집안을 살펴보게 됐다. 그리고 정씨는 곧 악취의 근원을 알게 됐다. 안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시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발견된 이는 2005년 6월9일 실종된 이해령(당시 30살)씨였다. 그 전해에 결혼한 새댁이었던 해령씨는 이미 남편에 의해 실종신고가 된 상태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의아해했다. 해령씨가 사는 곳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이라 그 아파트까지 갈 이유도, 그곳에서 발견될 이유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신 발견 이틀 뒤 나온 부검 결과는 상황을 더욱 곤란하게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해령씨가 실종 당일인 6월9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지만, 시신이 너무 부패 돼 사망 전 어떤 외상을 입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회신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추정 가능한 것은 설골(목뿔뼈)이 골절된 것으로 보아, 경부압박 질식사 즉 목 졸림에 의한 사망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사망 추정일인 6월9일, 해령씨는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한 뒤 집 정리를 간단하게 마치고 오전 9시 무렵 외출했다. 오전 11시경 한복점에서 볼 일을 마친 해령씨는 곧이어 11시23분쯤 한 식당에서 포장 도시락을 구매했다. 해령씨가 도시락을 들고 찾은 곳은 대학시절 따르던 A교수의 연구실. 당시 해령씨는 교수의 부탁으로 학술 행사 자원봉사를 위해 거의 매일 학교에 갔었고, 그날은 며칠 전 끝난 행사 뒷정리를 포함해 교수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들렀다는 것이다. A교수와 함께 도시락을 먹고 헤어진 해령씨는 자원봉사를 함께 했던 후배와 통화를 마친 뒤 교내 은행에 들렀다. 은행 시시티브이(CCTV. 폐쇄회로 티브이)에 의하면 그때는 오후 2시23분 무렵. 세상에 남긴 해령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6월9일 오후 2시23분 은행을 나간 뒤, 6월16일 미입주 아파트의 안방 화장실에서 발견되기까지 해령씨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해령씨가 발견된 미입주 아파트는 해령씨가 졸업한 학교와 멀지는 않은 위치에 있었지만,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었다. 해령씨가 졸업한 학교의 학생들도 입을 모아 그곳은 전혀 갈 일이 없는 곳이라 증언했다.
그런데, 해령씨의 소지품 중 수첩에서 미심쩍은 것이 발견됐다. 해령씨가 메모한 미입주 아파트 근처의 공인중개사 사무실 번호였다. 하지만 이미 신혼집이 있는 해령씨가 새로 집을 구하러 다닐 일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남편이 해령씨가 생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A교수가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 지역을 잘 아는 해령씨가 같이 집을 보러 다니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A교수는 부인했다. 해령씨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닌 적은 없다는 것. 교수의 주장은 자신을 잘 따랐던 해령씨가 새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임을 눈치를 채고 혼자 집을 보러 갔던 것은 아닌가 싶다는 것이었다. 진실을 알고 있는 해령씨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두 사람 중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밝혀낼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시신이 발견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정밀 검사를 통해 해령씨의 시신에서 남성의 유전자가 발견됐다. 사건의 결정적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경찰은 해령씨 주변의 400여명을 대상으로 유전자 감식에 나섰다.
그중 첫 번째 용의 선상에 오른 이는 해령씨의 옛 남자친구였다. 헤어진 뒤에도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던 그는 해령씨와 같은 대학의 법대에 편입했다며 접근했던 인물이었는데, 경찰 조사 결과 그건 거짓말로 밝혀졌던 것이었다. ‘결혼한 애인을 잊지 못해 거짓말까지 꾸며내며 접근했다 결국 살해한 것’이라는 가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건 무렵 부산 광안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너무도 명확한 알리바이였다. 게다가 해령씨의 시신에서 발견된 유전자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A교수도 조사대상 중 한 사람이었다. 경찰로부터 시신에서 남성의 유전자가 발견됐다는 얘길 들은 그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자신과 해령씨가 사실은 내연 관계였다는 것. 그리고 실종 당일에도 신체적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교수는 해령씨가 남긴 유서를 찾아냈다는 얘기도 털어놓았다. 업무용 공용 노트북에 해령씨가 남겼다는 유서엔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는데 교수는 그 비밀번호를 푸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유서의 내용은 시부모와의 불화 때문에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는 것, 자신의 장례식에 시부모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그건 생전의 해령씨가 누구에게도 내색하거나 털어놓은 적 없는 얘기였다. 경찰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해령씨의 결혼생활에 특별한 불화는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A교수는 평소 해령씨가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해 여러 차례 털어놓았다고 밝혔다. 해령씨는 왜 사실이 아닌 얘기를 교수에게 했을까? 혹은 정말 그런 얘기를 했을까? 그러나 이 역시 진실을 알고 있는 해령씨가 이 세상에 없으니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해령씨의 가족들이 A교수가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털어놓았다. A교수가 실종 당일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해령씨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해령 씨가 귀가했는지 물었다는 것. 이날 교수는 몇 번 인사한 사이였을 뿐인 해령씨의 전 남자친구에게도 전화를 걸어 해령씨를 찾았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A교수에 대한 더 이상의 조사는 불가능했다. 시신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교수의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령씨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남편도 용의 선상에 올랐다. 그에게는 혼외 관계의 여성이 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경찰에 그 얘기를 전한 이는 해령씨의 친정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어째서 그런 얘기를 하게 됐을까? 해령씨가 실종되고 온 집안이 들썩이던 중 어머니는 A교수의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리고 교수로부터 생전의 해령씨가 남편에게 다른 여성이 있어 힘들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누구보다 아끼고 믿었던 사위에 대한 배신감에 어머니는 분노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그건 사실무근이었다. 해령씨 실종 당일부터 시신 발견 날까지 사위의 알리바이는 명확했다. 시신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사위의 유전자 또한 일치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의 시신과 현장은 사건의 중요한 실마리를 품고 있다. 해령씨의 경우는 시신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가 희박했지만, 선뜻 풀기 힘든 의문이 하나 있었다. 부검 결과 시신의 간과 비장 조직에서 0.14%의 알코올 성분이 검출됐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해령씨는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2005년 2월부터 넉 달 가까이 위장약을 복용하던 중이었다. 술을 마실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체내엔 여러 종류의 알코올 성분이 생겨난다. 해령씨의 시신은 부패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으니,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던 중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에게 다시 문의한 결과 ‘간과 비장 조직에서 검출된 알코올 농도가 그 정도라면 술을 직접 마셨던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답을 들었다. 그렇다면 평소 주량으로도 성격으로도 당시 상황으로도, 어느 모로 봐도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실 리가 없던 해령씨는 6월9일 오후 2시23분 은행을 나선 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술을 마셨던 걸까? 자의로는 취하도록 술을 마실 리 없던 해령씨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상황을 아는 목격자의 증언이 절실한 지점이다.
해령씨가 발견된 현장은 어땠을까. 해령씨는 손목에 고가의 시계를 그대로 찬 채였고, 가방엔 신용카드와 상품권은 물론 현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금품을 노린 범행은 아닌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그런데 화장실 양변기 뒤의 수납장 유리가 깨져 있었다. 신축 미입주 아파트였으므로 누군가가 사용하던 중 깨졌을 가능성은 희박했고, 경찰은 충격에 의한 손상으로 추정했다. 또 그 틈에서 긴 머리카락이 한 움큼 발견됐는데, 감식 결과 해령씨의 머리카락으로 판명됐다. 누군가 해령씨의 머리를 강하게 수납장에 부딪쳤을 것이란 추정이, 즉 몸싸움이 있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화장실 안에서 ‘애시워스’(Ashworth)라는 브랜드명이 음각된 단추 하나가 발견됐다. ‘애시워스’는 국내 대기업이 한때 수입한 적도 있었던 미국 골프웨어 브랜드다. 단추는 실이 풀려 저절로 떨어졌다기보다는 뜯겨 나간 것으로 보이는 상태였다.그 때문에 경찰은 이 단추가 범인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2005년 6월9일 ‘애쉬워스’ 브랜드의 옷을 입고 해령씨와 함께 성북구 돈암동 미입주 아파트에 들어왔던 그(혹은 그녀)는 누구일까. 그(혹은 그녀)는 어째서 해령씨를 살해한 걸까. 2005년 6월9일 오후 2시23분 이후 해령씨를 목격한 분 혹은 해령 씨와 동행하는 사람을 본 분들의 증언이 간절하다.
※ 2005년 6월 발생한 성북구 미입주 아파트 사건에 대한 정보가 있는 분은 서울지방경찰청 중요미제사건 수사팀(010-7489-0650)으로 제보 부탁드립니다.
조수진(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