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천편일률적인 주류 일색인 차림표를 펼쳐 들고 한숨을 쉬는 일은 한국의 술꾼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라고 주당의 입장에서 감히 주장한다. 늘 비슷한 맛의 소주와 맥주는 정말이지 이제 조금 ‘쉬고 싶다’. 무턱대고 마시고 싶은 술을 식당에 가져가는 것도 실례고 민폐인 줄로 안다. 하지만 팍팍하고 척박하기까지 한 상황이지만 늘 선구자는 있다.
정신이 혼미한 채로 바에서 마시는 위스키는 독하고 쓰고 비싼 술이다. 특유의 달콤한 향과 높은 도수 때문에 음식과 함께 즐기기에는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서울 경복궁역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가는 길목에는 ‘옥반상’이라 이름 붙은, 도가니탕 색을 닮은 새하얀 식당이 있다. 수더분한 거리에 있어서 이 식당의 ‘모던’한 분위기가 더 눈에 띄었다. 디저트 카페인 양, 건축사무소인 양 서 있는 모양새는 절대 곰탕집이라는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도 곰탕집 특유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 ‘국밥집 다녀왔다’고 자랑하듯 온몸에 짙게 배는 고기 냄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차림은 간편하다. 곰탕, 도가니탕 반상이 메인 메뉴의 전부고, 수육과 도가니 무침, 꼬막무침을 곁들일 수 있는 식이다. 별생각 없이 들춘 주류 리스트를 보고 눈이 뒤집혔다.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시조 읊듯 술 이름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린다. 글렌모렌지, 매캘란, 발베니 같은 고급 싱글몰트 위스키부터 특유의 소독약 향이 매력적인 아일레이(Islay) 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와 버번까지. 이렇게 많은 선택지가 있는 곰탕집, 아니 고깃집이 있던가? 모든 위스키는 잔술로도, 병째로도 파니, 한껏 취하느냐 마느냐는 선택할 일이다.
매주 한 가지 위스키를 정해서 5000원에 파는 ‘위클리 위스키’는 무척 깜찍한 이벤트다. 간단히 점심 먹으러 왔다가 위스키 한잔 걸칠 이유가 생긴 셈이다. 전국에서 생산하는 대부분의 소주도 있다. 술에 집중하는 사이 도가니탕과 수육, 꼬막무침이 나왔다. 집에서 엄마가 끓인 듯 뽀얗고 진한 도가니탕에는 주먹만한 도가니뼈가 두 개나, 하늘하늘하게 썬 수육 역시 접시 한가득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백합 조개만큼 큼지막한 꼬막을 매콤하게 무친 꼬막무침, 곁들이는 오이, 고추무침도 입맛을 당긴다. 도가니탕에 밥 말아 김치를 얹고 달콤한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위클리 위스키’ 한잔으로 시작했던 대낮의 음주는 소주로, 맥주로, 또다시 위스키로 옮겨간다.
살다 살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진짜로 세상은 요지경이고 술의 세계는 늘 아름답다. 곰탕과 도가니탕, 그리고 위스키. 또 하나의 소원을 성취했다.
백문영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옥반상 도가니탕과 위스키 한잔. 백문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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