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조수진의 미제사건 노트│동해 학습지 교사 살해 사건
우물에서 시신 발견
6일 전 실종 신고된
마을과 연고 없는 교사 정용씨는 급히 마을 통장에게 전화를 걸어 알렸지만, 좀도둑조차 없던 평화로운 마을이었기에 통장은 그의 말을 선뜻 믿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뒤, 산불감시원으로 일하던 동네 노인이 급한 표정으로 스쿠터를 타고 달려오더니 우물 속에 시신이 있다고 재차 알렸다. 마을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우물 속에서 발견된 이는 약천마을에 아무 연고가 없는 스물네 살의 학습지 교사 김현미(가명)씨였고, 엿새 전인 3월8일 오후 9시40분쯤 가족에 의해 실종신고된 상태였다. 현미씨는 그날 저녁 동해시 부곡동의 한 아파트에서 가정방문 수업을 마친 뒤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우물은 1m도 채 되지 않는 얕은 깊이여서 실수로라도 성인 여성이 빠져 익사할 가능성은 없었다. 부검결과 사인은 경부 압박 질식사였다. 시신의 특정 부위에 경미한 상처가 있었지만, 달리 성폭행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누군가 현미씨를 성폭행하려다 실패한 뒤, 살해하고 약천마을 우물 속에 유기한 것으로 판단했다. 현미씨는 실종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보통 위장에 음식물이 머무는 시간은 5시간에서 6시간가량인데, 현미씨의 위장엔 당시 음식물이 남아있었고, 마지막 수업을 했던 학생의 어머니가 대접했다고 진술한 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시신 발견 다음 날 오후 약천마을에서 7~8km 떨어진 동해체육관 앞 주차장에서 현미씨의 승용차를 발견했다. 누군가 함부로 뒤진 흔적이 역력한 차 속에선 현미씨의 옷과 소지품 중 일부가 발견됐다. 그러나 범인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범인이 물걸레로 승용차의 내부와 외부를 꼼꼼히 닦아냈기 때문이었다. 승용차가 발견된 곳이 주차장 수돗가였던 건 우연이 아니라, 흔적을 지우기 위해 범인이 용의주도하게 선택한 장소인 걸로 보였다. 범인은 동해시 부곡동에서 가정방문 수업을 마치고 나와 승용차에 오르던 현미씨를 납치해 살해한 뒤, 4km 떨어진 약천마을까지 이동해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즉시 이동 경로에 설치된 시시티브이(CCTV)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약천마을 인근 산불감시 카메라에 포착된 현미씨의 승용차를 발견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다. 늦은 밤인 데다 해상도가 떨어지는 영상이었기 때문이다. 운전자가 여성(현미씨)인지 남성(범인)인지조차 판독이 불가능했다. 경찰은 다시 시신 유기장소인 약천마을에서 승용차 발견 장소인 동해체육관에 이르는 7~8km 경로의 시시티브이들도 모두 확인했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 그런데 현미씨가 살해되고 석 달쯤 흐른 2006년 6월1일 밤, 흡사한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현미씨가 실종됐던 동해시 부곡동에서 자신의 승용차에 오르던 40대 여성이 등 뒤에서 나타난 괴한으로부터 폭행당한 후 납치된 것. 범인은 성폭행을 시도했지만 격렬한 반항에 부딪히자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해자가 의식을 잃자 승용차와 함께 도로변에 버리고 도주했다. 그곳은 현미씨의 시신이 발견된 약천마을 근처였다.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피해자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긴장했다. 현미씨 살해 사건과 동일범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피해자는 한밤중에 등 뒤에서 습격당한 뒤 곧 정신을 잃었던 탓에 범인이 30대로 보였다는 것 외에 인상착의를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경찰은 범인의 흔적을 찾아 피해자의 승용차를 샅샅이 뒤졌지만, 이번에도 범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 사건은 동해시 곳곳에 순식간에 알려졌고 흉흉한 소문과 괴담까지 나돌았지만, 범인을 추적하는 건 더 이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3주일 뒤인 6월23일 밤, 동해시 부곡동의 또 다른 아파트 앞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승용차에서 내리려던 40대 여성을 차 안으로 밀어 넣으며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피해자가 비명을 지르며 완강하게 저항하자 포기하고 달아나 근처의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때는 목격자도 있었다. 같은 아파트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현역 군인이었다. 그는 사람 살리라는 피해자의 비명을 듣고 달려나가 골목으로 사라진 범인을 추격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늦은 밤이었던 탓에 목격자에게서도 피해자에게서도 범인이 40대가량의 남성으로 보였다는 진술 외엔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경찰은 피해자와 범인이 몸싸움을 벌였던 승용차를 정밀감식했다. 그리고 룸미러 프레임에 끼어 있던 머리카락 한 올에서 유전자를 확보했다. 그것은 피해자의 것도 피해자의 가족이나 승용차에 동승한 적 있는 지인들의 것도 아니었다. 범인의 것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강하게 승용차 안으로 밀어 넣는 범인에 저항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는 피해자의 진술로 미뤄, 그 과정에서 룸미러에 부딪혀 빠진 범인의 머리카락일 가능성이 큰 것. 수사는 활기를 띠었다. 경찰은 지역 내 동일범죄자와 강력범죄자는 물론 현미씨 사건 수사 당시 용의선상에 올랐던 인물들과도 유전자를 대조했다. 세 건의 사건이 동일범에 의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세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서로 달랐지만, 모두 동해시 부곡동의 아파트 단지 안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세 장소는 모두 반경 150m 안에 위치한 곳이었다. 또 밤 9시 전후의 늦은 시각이었다는 점, 아파트 근처에서 혼자 승용차에 오르던 여성들을 제압해 승용차째 납치를 시도했다는 점도 동일범이라는 의심을 뒷받침했다. 무엇보다 경찰이 주목한 것은 세 피해자(현미씨와 두 사람의 40대 여성)의 체구였다. 현미씨는 키 150cm 남짓의 작은 체구였는데, 다른 두 사람의 피해자도 현미씨와 체구가 비슷했다. 경찰은 범인이 별도의 흉기 없이 완력으로 제압하려 했기에 가능한 한 작은 체구의 여성들을 범행 대상으로 골랐던 거로 판단했다. 흉기를 사용하면 범죄의 흔적이 남을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범인은 그 점을 고려했을 만큼 용의주도했던 인물로 보였다. 동해시에서 유사 사건 발생
유능한 미제사건 해결사 강원청 전담 경찰은 만일의 경우 몰아닥칠 파장을 우려해 이 사건들이 연쇄 범죄라고 따로 공표하진 않았지만,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집중적으로 수사했다. 그러나 결국 일치하는 유전자도 별다른 범인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2006년 당시엔 시시티브이도 차량 블랙박스도 보편화되기 전이었던 점, 범행이 늦은 밤에 저질러져 목격자가 거의 없었던 점 등도 사건 해결을 어렵게 했다. 사건이 발생하고 12년이 흘렀다. 동해시에선 그 뒤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고, 현미씨 사건은 아직도 진범이 잡히지 않은 채 강원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으로 이관돼 있다. 그러나 아직 비관은 이르다. 강원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에선 지난해에만 두 건의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했다. 각각 13년 전과 15년 전 사건들이다. 강원청 미제팀은 지금도 남은 미제사건들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2015년 8월 일명 ‘태완이법’이 시행되면서 2000년 8월1일 이후 발생한 살인 사건들의 공소시효가 사라졌다. 이 말은 ‘범인이 잡힐 때까지 추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날 밤,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학생의 집을 나섰을 현미씨에게서 쌓인 피로를 달랠 휴식도, 꿈꾸며 설계하던 미래도 모두 빼앗아버린 범인. 분명한 건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그놈은 반드시 잡힐 것이란 점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