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지문도 없다! 족적도 없다! 흔적 없이 사라진 범인! 광주 박스테이프 사건

사람은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 따라서 누구든 언젠가는 가족의 죽음을 맞는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데 심지어 그게 자녀라면? 자녀의 시신을 보게 된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는 감히 함부로 가늠할 수가 없다.

오래전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응급실에 막 도착한 20대 청년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강도 살인 피해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10분쯤 뒤 응급실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 앞에 선 순간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글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응급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의료진도 경찰도 취재진도, 다른 병상의 환자와 보호자들까지도 모두 얼어붙었다. 마치 ‘일시 정지’를 누른 영상처럼 한동안 모두가 정지했었다. 그 어머니의 비통함이 순식간에 모두의 심장을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애끊는’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나 슬퍼서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이다. 말로만 들었던 그 표현이 왜 생겨난 것인지 그 어머니의 외마디 비명을 들은 후 절감할 수 있었다.

임용고시 준비하던 여대생
집에서 시신으로 발견

2004년 9월14일 광주광역시 북구에서 발생한 서지민(가명, 사건당시 22세)씨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지민씨의 어머니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날 오전 9시가 가까웠을 무렵, 어머니는 집을 나섰다. 활동하고 있던 테니스 동호회에서 월례대회를 여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민씨의 가족은 모두 넷이었는데, 아버지는 오전 7시30분 무렵 이미 출근했고, 지민씨의 오빠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었다. 광주의 한 대학교 미술교육과 4학년이던 지민씨는 어머니가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침대에 있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전날 밤늦게 도서관에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학교에서 늦게 오는 딸을 위해 도시락을 싸서 차비 1만3000원과 함께 식탁에 올려두었다.

어머니가 다시 집에 돌아온 때는 저녁 8시30분쯤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아직 귀가하지 않았을 시각이라 집안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연 어머니의 눈에 거기 있어선 안 될 것들이 들어왔다. 딸 지민씨의 가방과 책 그리고 식탁 위에 올려뒀던 도시락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서던 어머니의 눈에 또 다른 것이 들어왔다. 핏자국이었다. 현관에서 시작된 핏자국은 지민씨의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놀란 어머니가 핏자국을 따라 지민씨의 방에 들어섰을 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지민씨가 끔찍한 모습으로 침대에 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경황없던 어머니가 112를 누르려다 119를 눌렀지만 경찰은 곧 도착했다. 그러나 경찰도 지민씨의 방을 들여다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지민씨의 양쪽 팔은 등 뒤에서 스카프로 결박돼 있었다. 그리고 머리엔 박스테이프가 감겨져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부검결과 지민씨의 머리에서 모두 일곱 곳의 상처가 발견됐다. 범인이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찧어 생긴 상처로 추정됐다. 지민씨의 얼굴에서 발견된 멍과 입술 안쪽의 상처 등도 폭행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사망 원인은 폭행이 아니었다. 사인은 ‘비구폐쇄로 인한 질식사’ 즉 머리에 감긴 박스테이프 때문에 질식해 숨진 것이었다.

당시 방바닥엔 지민씨의 지갑과 지갑 안에 들어있던 카드 등이 흩어져 있었다. 범인이 지갑에서 카드를 한 장씩 빼며 살펴본 흔적이라고 경찰은 판단했다. 안방 곳곳에도 범인이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서랍들이 열려 있었고 지민씨 부모님의 가방이며 소지품도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집에서 사라진 건 어머니가 도시락과 함께 식탁에 올려뒀던 1만3000원과 지민씨의 휴대전화뿐이었다.

경찰은 현관과 지민씨의 방을 비롯해 집안 곳곳을 샅샅이 조사했다. 특히 범행에 사용한 테이프엔 지문이 남기 쉽기 때문에 범인의 지문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기대했지만, 단 하나의 지문도 발견할 수 없었다. 집안에서 몇 점의 지문을 채취해 분석 의뢰했지만 모두 지민씨 가족들의 지문이었고, 족적 또한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또 현관에서 지민씨의 방까지 이어진 혈흔도 모두 조사했지만, 범인의 유전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경찰은 시신이 발견된 당시의 모습과 정황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선 오전 9시 전후부터 귀가한 저녁 8시30분 사이, 열한 시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지민씨의 강의 시간표에 의하면 그날 오전엔 강의가 있었다. 집에서 양말을 신지 않는 지민씨가 양말을 신은 채 발견된 점, 현관에 가방과 책이 흩어져 있었던 점, 어머니가 식탁에 올려두고 외출했던 도시락과 지민씨의 귀걸이가 함께 현관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지민씨는 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던 걸로 추정됐다. 국과수가 부검 뒤 밝힌 사망 추정 시각도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였다.

사인은 박스테이프로 인한 질식사
휴대전화·1만3000원만 사라져

게다가 지민씨의 집 위층에 사는 주민들이 그 무렵 낯선 남성의 방문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지민씨의 집은 13층이었는데, 14층과 15층에 사는 주민들이 그날 그 시각쯤 낯선 남자가 와서 벨을 눌렀지만 모르는 사람이라 열어주지 않았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범인이 15층부터 차례로 내려가며 범행 대상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범인이 수리나 택배 기사로 위장했다면 학교에 가려고 준비를 마친 지민씨가 경계심 없이 문을 열어줬을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지민씨의 집 아래층에 사는 주민의 증언도 잇따랐다. ‘정확한 시각은 기억나지 않지만 9월14일 오전 10시부터 11시30분 사이 위층에서 뭔가를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쿵쿵 여러 번 들렸다’고 한 것. 국과수가 밝힌 사망 추정 시각이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였고, 지민씨의 머리에서 발견된 일곱 곳의 상처를 생각하면 충분히 주목할 만한 증언이었다.

범인이 한 명 이상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게 하는 증언도 나왔다. 사건 당일 오전 11시쯤 외출하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주민이 지민씨의 집이 있는 13층에서 ‘스포츠머리’를 한 남성 두 사람을 봤다고 알려온 것이다. 범행에 쓰인 스카프와 박스 테이프가 모두 집에 있던 물건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 역시 귀여겨들을만한 증언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지민씨는 꽤 격렬하게 범인에게 반항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범인이 지민씨를 제압하는 동시에 집에 있는 스카프와 테이프를 찾아내 결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 흘깃 본 목격담만으로 몽타주를 만들기는 무리였고, 당시 해당 아파트엔 시시티브이(CCTV)가 전혀 없어 두 남성의 인상착의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또 경찰은 지민씨의 방을 조사하던 중 컴퓨터에서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오전 10시부터 11시30분까지 1시간 30분가량 누군가 인터넷을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검색어가 주로 증거 인멸에 관한 것이었다. 경찰은 범인이 지민씨를 살해한 뒤에도 떠나지 않고 집안에 1시간30분 이상 머문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컴퓨터에서도 범인의 지문 등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사라진 지민씨 휴대전화의 행방을 쫓았다. 범인이 집안의 더 값나가는 물건들 대신 1만3000원과 휴대전화만을 가지고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만3000원은 범인이 발견한 유일한 현금이어서 그랬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지만, 휴대전화는 왜 가지고 떠났을까. 혹시 휴대전화에 어떤 단서가 숨어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러나 사건 당일 오후 12시49분쯤 광주광역시의 한 한방병원 인근에서 마지막으로 신호가 잡힌 뒤 휴대전화는 꺼졌고 더 이상 휴대전화를 통한 추적은 불가능했다.

경찰은 범인의 범행 동기가 단순히 금품이나 성폭행 때문이 아닐 가능성도 열어두고, 지민씨의 지인 및 교우관계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특히 부검 결과 시신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지민씨의 전 남자친구 등 11명에게서 채취한 유전자를 분석 의뢰했다. 그러나 유전자 판독에는 결국 실패했다. 발견된 유전자가 남성의 유전자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 더 이상의 분석은 힘들 만큼 양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건 발생 추정 시각에 동아리방에 있었다는 전 남자친구의 진술도 사실로 판명됐고, 지민씨가 새로 사귄 남자친구는 군 복무 중으로 알리바이가 명확했다.

수상한 남자 둘 주민 제보
동종 수법 전과자 조사···소용없어

이어서 경찰은 해당 시간대 기지국 수사를 통해 500명이 넘는 인원의 통화 내용을 조사했고, 동종 범죄 전과자 30여명과 테이프를 사용하는 등 동종 수법 전과자 55명도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도 혐의점은 찾을 수 없었다.

2004년 9월14일 지민씨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날짜로 따지면 오늘로 5036일째가 된다. 그날 자신도 딸과 함께 죽었다고 했던 지민씨의 어머니는 그동안 매일매일 5036번의 죽음을 겪어왔다. 범인을 잡는다고 해서 지민씨가 살아 돌아올 리 없고, 어머니의 고통이 보상받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것이 지민씨의 원통한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이고, 어머니의 5037번째 5038번째 5039번째 죽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5년 8월 일명 ‘태완이 법’이 시행되면서 2000년 8월1일 이후의 살인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사라졌다. 이 사건은 광주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이 맡고 있고, 지금도 추적은 계속되고 있다.

※ 2004년 9월 14일 발생한 ‘광주 박스테이프 사건’에 관한 정보가 있는 분은 광주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062-609-2173)으로 제보해주세요.

글 조수진(방송작가),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한겨레> 자료 사진, 그래픽 이경희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