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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재즈처럼 편안하게, 떡볶이처럼 치열하게

등록 2018-07-19 09:51수정 2018-07-19 10:02

[ESC]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신춘 후라이’의 메뉴. 백문영 제공
’신춘 후라이’의 메뉴. 백문영 제공

두피마저 녹여버릴 듯한,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 여름만큼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계절이 또 있을까? 며칠 전 짧은 반바지를 입고, 신으나 마나 한 슬리퍼를 끌다시피 꿰어 신고 맥주 마실 곳을 물색했다. 노상에서 마실 수 있는 호프집, 진하고 화려한 맛의 크래프트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펍도 좋지만 30도가 넘는 날에는 시원한 실내에서 마시는 병맥주가 역시 최고다.

오래전 알게 된 술친구를 지하철 구의역 4번 출구에서 만났다. 늘 20대 젊은이들과 새로 생긴 식당과 술집으로 복닥거리는 건대입구역이 아닌 구의역을 고른 이유는 단 한 가지, 적막 때문이었다. 오래된 주택가와 병원, 상가 건물뿐인 구의역 근방에서 먹고 마시기에 적당한 곳을 찾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동네일수록 구석구석 숨어있는 ‘재야의 고수’를 만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대로변을 지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 마주한 간판이 ‘신춘 후라이’였다. 강렬한 빨간색과 주황색, 살구색이 교차하며 칠해진 간판에 적힌 한문 ‘신춘(新春)’이 묘한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실내는 그다지 넓지 않다. 들어가면 일본 뒷골목 경양식 집에 온 듯, 홍콩의 작은 식당에 들어선 듯 낯설면서도 정겨운 분위기가 물씬 난다. 아마 흐르는 은은한 재즈 음악 때문이 아닐까? 분식집에서 재즈를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떡볶이와 튀김이 기가 막힌다”라는 술친구의 말에 떡볶이 1인분, ‘피시 앤 칩스’와 병맥주를 주문했다. 쫀득쫀득하고 두꺼운 쌀 가래떡에 바삭한 튀김 가루를 듬뿍 올린 떡볶이는 정겹고 따뜻했다. 쫄깃한 떡을 찍어 먹고 시리얼을 퍼먹듯이 숟가락으로 튀김 가루를 건져 바삭바삭 씹어 먹었다. ‘피시 앤 칩스’는 큼지막한 흰 살 생선을 바로 튀겨낸 모양새였다. 다른 곳의 ‘피시 앤 칩스’와 달리 튀김옷에 향신료의 일종인 쿠민(미나릿과 한해살이풀. 씨는 카레, 스튜 등에 향신료로 쓰인다)을 넣고 튀겨 향긋함이 턱까지 스민다.

온화한 봄과 풍성한 가을은 그 나름대로 평화롭다. 서슬 퍼런 겨울은 포근하고 안온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름만큼이나 찬란하고 젊은 계절이 또 있을까? 복잡한 계획 따위는 먹고 마시는 데 필요 없다. 계획은 계획인 채로 놓아두고, 가게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처럼 때론 편안하게 먹고, 가끔은 치열하게 전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맥주잔을 비우며 생각했던 밤이었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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