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미제사건 노트
남편·이웃 주민 조사···무관한 것으로 결론 그런데 아침 6시면 도착하던 첫 버스가 그날따라 제시간에 오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각에 짙은 색 트라제 XG 차량이 나타나더니 은영씨가 서 있는 지점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한 차량에선 남성 운전자가 내렸고. 은영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시간은 불과 10여초 가량. 은영씨가 트라제 XG 차량의 조수석에 오르자 차량은 은영씨 집이 있는 모충동 방면으로 떠났다. 그게 은영씨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모습이었다. 은영씨가 실종된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약 4.8㎞ 거리이고 이동 시간은 약 12분 정도다. 그런데 은영씨의 휴대전화가 버스정류장을 떠나고 17분 뒤 집 근처에서 강제 종료됐고, 은영씨는 14일 뒤 대전광역시 신탄진동 강가에서 시신으로 돌아왔다. 시신에는 신발이 신겨져 있지 않았지만 발은 깨끗했다. 경찰은 누군가 차 안 혹은 실내에서 은영씨를 살해한 뒤 발견 장소에 유기한 것으로 봤다. 부검 결과 이은영씨의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밝혀졌고, 시신에서 남성의 유전자가 채취됐다. 그런데 부검의는 시신의 상태가 다른 경부압박 질식사 피해자와 좀 다르다고 했다. 시신에선 반항한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머리에 씌운 검은 비닐봉지를 두 번 묶은 매듭만이 전부였다는 것. 게다가 마취제 등 약물 성분도 검출되지 않았고, 다른 범행 도구를 사용한 흔적도 없었다. 법의학자인 전북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이호 교수는 “죽음이 임박해 있는데 반항하지 않을 사람은 없거든요, 본능적으로. 왜 반항하지 못했을까 이게 의아한 거예요. 반항하지 못하도록 누군가에 의해 팔목이나 손목을 제압당했느냐. 그런 흔적도 없어요. 반항도 못 했고 2인 이상에 의해 제압된 흔적도 없으면서 오로지 경부압박과 비구폐색(코와 입이 강제로 닫힘)으로 사망한 흔적만 남아 있거든요. 이게 조금 희한하다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의문의 차량에 올라 사라진 이은영씨가 사망한 때는 언제일까. 사망 시각은 실종 당일인 1월18일 오전 8시에서 9시 무렵으로 추정됐다. 위에서 소화되지 않은 김과 밥이 확인됐는데, 실종 당일 새벽 5시에 업무를 끝낸 뒤 김밥으로 함께 식사를 했다는 동료 청소직원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의학자인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 교실 유성호 교수 역시 “두 시간 정도면 죽 상태여야 해요. 그런데 이 분의 위장에서 알약이 어느 정도 형태가 유지된 채로 보였어요. 그렇다면 이 분이 마지막으로 실종된 시간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최소한 두 시간을 넘기지 않은 시각에 돌아가신 게 아닌가...”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가장 먼저 용의 선상에 오른 것은 은영씨의 남편이었다. 당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증언을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은영씨가 실종되고 사흘 뒤에야 실종 신고를 한 점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남편은 근처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기에 알리바이가 명확했다. 실종 신고가 늦은 이유도 평소 은영씨가 친정에 가서 자고 오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편의 유전자가 은영씨의 시신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일치하지 않았다. 경찰, 1200여명 남성 유전자 대조
차량 약 1만7300여대도 조사 경찰이 다음으로 주목한 사람은 은영씨의 이웃 주민이었다. 그 이웃 주민은 당시 은영씨와 10년 넘게 알고 지냈던 인물인데, 현금을 빌려주곤 따로 만나자고 추근거리기도 했다는 동네 주민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전자 대조 결과 그도 범인은 아니었다. 경찰은 사건 뒤 약 1년 동안 은영씨 주변 인물과 동종범죄 전과자 등 1천여명의 유전자를 대조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심지어 은영씨가 일했던 대형마트 종사자 가운데 남성 2백여명의 유전자를 채취해 대조했지만 허탕이었다. 은영씨를 태우고 사라진 트라제 XG 차주도 집요하게 추적했다. 시시티브이 영상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반대 방향으로 주행 중이던 차량이 은영씨를 보는 순간 급히 유턴해 버스정류장 쪽으로 접근한 정황이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은영씨가 실종된 정류장에서 집에 이르는 경로의 시시티브이 9대를 모두 수거해 조사했지만, 화질이 매우 좋지 않아 차량 번호는 식별할 수 없었다.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차량의 종류가 트라제 XG란 점뿐. 경찰은 실종 현장 및 시신 발견 장소 인근을 지났거나 청주와 대전 등 인근 지역에 등록된 트라제 XG 차량 약 1만7300여대를 조사했다. 그리고 그중 알리바이가 불확실한 약 800여명의 유전자를 채취해 대조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수사 기록은 차곡차곡 쌓여 2500여 쪽에 달했다. 그런데 트라제 동호회 매니저와 회원들이 용의 차량에 대해 예리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들은 모두 세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은영씨를 태우고 사라진 차량 옆면의 몰딩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차량 옆면에 일자 크롬 몰딩이 부착돼있는 형태는 1999년부터 2002년 초반까지 생산 판매된 트라제 XG의 특징이라는 것이었다. 둘째, 차 문이 열릴 때 보이는 문등을 지적했다. 트라제 XG는 세 단계로 등급이 나뉘는데 안쪽 문등은 중급 이상에만 장착돼있다는 것. 셋째, 차 뒤쪽 보조 브레이크등으로 보아 용의 차량은 엘피지(LPG) 차량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뒷좌석 유리창 안쪽에 보조 브레이크등이 있으면 엘피지 차량이고 바깥에 있으면 디젤 차량이라는 것. 그런가 하면 법영상분석연구소 황민구 소장은 사진 계측 프로그램을 통해 용의 차량 운전자가 174~180㎝ 키에 보통 체격의 남성이라고 분석했다. 애초 경찰은 은영씨가 쉽게 차에 오른 점으로 보아 면식범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황 소장의 의견은 달랐다. 실종 당시 시시티브이 영상을 분석한 결과, 용의 차량 운전자가 말을 걸자 은영씨가 흠칫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 트라제 동호회 "1999~2002년 생산된 것"
범인 174~180cm로 추정···면식범이 아닐 수도 범죄 심리학자인 경기대 이수정 교수 또한 이렇게 분석했다. “피해자가 범인을 보고 즉시 차에 안 올라타죠. 오히려 뒷걸음을 치면서 뭔가 더 주춤하는 반응을 보인단 말이에요. 피해자 입장에서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이는, 그렇기 때문에 비면식관계일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죠.” 간혹 시시티브이 영상 속에서 새벽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던 이은영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면 궁금해진다. 그때 은영씨는 어떤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을까. 새벽 5시에 김밥을 먹었으니 배는 고프지 않았겠다. 밤새 청소를 했으니 몸은 좀 피곤했을까? 그날 퇴근 뒤에 하려던, 그러나 결국 다시는 하지 못하게 된 소소한 일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신에게 얼마 뒤 닥칠 일은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겠지. 그러다 보면 그의 시신 사진도 떠오른다. 그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분노가 치민다. 누구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족과 다정한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추운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죽음을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가, 어째서 이은영씨에게 그런 죽음을 맞게 했을까.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매일 편히 잠들고 있을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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