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사회생활은 버겁고 돈을 버는 일이야말로 힘든 일이라고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럴 때 가는 곳이 경리단길(용산구 이태원동)의 ‘맥파이’다.
경리단길이야말로 새롭고 트렌드 한, 낡은 것과 젊은 것이 뒤섞인 ‘원조’ 힙 플레이스이자 유행의 본산지였다. 망리단길, 송리단길 등, 유행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그 아류가 나올 정도다. 그 경리단길의 유행을 이끈 ‘노포’ 가운데 하나가 한국 크래프트 맥주의 한 축인 맥파이다.
경리단길이 한껏 ‘힙스터’들로 가득 찼을 때, 맥파이는 그 중심에 있었다. 국산 생맥주, 그리고 기껏 해봐야 ‘독일식 수제 맥주’만 있었던 한국 맥주 시장에서 맥파이의 존재는 신선했다. 그런 이유로 지역에서 위치가 확고해졌다. 안주 따위 필요 없이 맥주 한 잔을 받아들고 주변 낯선 사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도 맥파이만의 것이었다.
지금의 맥파이는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담백하고 은은한 맥주 맛은 여전하지만, 새롭다기보다는 어쩐지 정겹다. 그 존재만으로도 고맙다. 혼자 방문해도, 둘이든 셋이든 가도 반갑다.
마음이 유난히 힘든 날이었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하는 것도 버거운 날이었다. 이런 날이 맥파이를 방문하는 날이다. 저녁까지 한 끼도 먹지 못하고 맥파이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배가 고팠지’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안주라고 부를 만한 것이 많지만, 구색 채우기에서만 그치는 먹거리만 있는 곳은 또 아니다.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와 시그니처 맥주인 ‘맥파이 페일 에일’을 주문했다.
주문하자마자 뜨거운 그릴에 버터를 바르는 모습이 보였다. 버터가 녹는, 그 특유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를 맡고 있으면 맥주가 그저 꿀떡꿀떡 넘어간다. 버터가 녹은 그릴에 식빵을 얹고 두껍게 썬 체더치즈와 짭조름한 햄을 더했다. 평범해 보일 수 있는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지만 이곳의 ‘킥’은 후추다. 굵게 간 후추를 치즈와 햄 사이에 듬뿍 뿌려 짜고 맵고 고소한 맥파이 특유의 감칠맛이 완성된다. 맥주 한 모금에 샌드위치 두 입, 그리고 또 맥주 한 잔. 나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이고 휴가다.
요즘 생긴 새로운 곳이나 유명한 사람이 있는 가게에 관심이 많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곳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버거울 때도 있다. 너무 많이 알려져서 다소 ‘촌스럽다’고 여겨지는 곳, 그렇지만 방문하는 이에게는 여전히 좋은 곳, 들어가는 들머리부터 옛 생각이 아련히 나기까지 하는 ‘신흥 노포’의 존재가 이럴 때 또 반갑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