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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소주 한 잔, 두부김치 한 점…낮술의 친구들

등록 2018-11-01 10:56수정 2018-11-01 14:02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우화식당의 두부김치. 사진 백문영 제공
우화식당의 두부김치. 사진 백문영 제공

“또 을지로야?” 비 오는 대낮,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의 말이었다. 친구들은 “을지로가 네 고향이라도 되니, 지겹지도 않으냐”는 소리를 하곤 했다. 을지로의 매력에 빠진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1차, 2차, 3차까지 달려도 몇 만원 안 드는 유흥비(?)가 매력적인 곳 을지로. 주머니 가벼운 나 같은 이에게는 구원이자 축복 같은 동네다.

며칠 전 간단히 점심을 먹고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으로 향했다. 여름 내내 드나들던 만선호프와 초원호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람의 변덕이란 이런 것일까? 날씨가 쌀쌀해졌다고 야외 테이블에는 앉고 싶지 않았다. 호프 골목을 지나 감자탕으로 유명한 ‘동원집’을 지나면 전으로 유명한 ‘원조 녹두’가 나온다. 하지만 그날은 영 내키지 않았다. 원조 녹두가 있는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묘하게 고풍스러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레트로(복고풍) 스타일’이라 불릴 만큼 낡고 오래된 ‘우화식당’ 간판이 나온다. ‘이런 식당까지 누가 술을 마시러 오나’하는 생각도 잠시뿐이다. 테이블이 다섯 개밖에 없는 이 작은 식당은 금세 동네 아저씨와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우화식당. 사진 백문영 제공
우화식당. 사진 백문영 제공
차림표를 보면 기가 막힌다. 그 옛날 글씨체로 쓰인 메뉴판에는 코다리찜, 두부김치, 소고기 전이라고만 적혀 있다. 주인 할머니는 “안주 하나당 무조건 술은 두 병 이상 주문하는 것이 우리 집의 원칙”이라고 무뚝뚝하게 설명한다. 안주도 적고, 더 뭘 요구하는 것도 어려운 분위기인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슬슬 좋아졌다.

두부김치와 소고기 전 하나를 주문하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소주를 한 병 꺼냈다. 기본 찬으로 나온 김치 한 점에 소주를 훌훌 털어 마시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프로 술꾼이 된 듯한 느낌에 짜릿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두부 한 무더기에 빨갛게 볶은 김치가 함께 나오는 두부김치는 여느 술집의 안주와 다르지 않지만, 그 엄청난 양이 압도적이었다. 매콤하고 아삭한 김치를 두부에 얹어 먹고 또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소고기 전은 떡갈비 같아 새로웠다. 두부와 소고기를 잘게 다져 섞은 뒤 후추를 뿌려 부쳐낸 소고기 전을 베어 물면 군만두를 먹는 듯 육즙이 입안에 고루 퍼진다.

“안주가 2개니 술은 4병 마셔야 한다”는 주인 할머니와의 약속도 어렵지 않게 지켰다. 다소 난감하고 곤란한 화장실 사정이나 낡은 노포(역사가 오래된 가게) 특유의 인테리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날씨 핑계, 직장 핑계, 인간관계 핑계까지 각종 핑계에 핑계를 더해 대낮부터 술을 마셔도 되는 곳,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 이곳이야말로 나에게는 최고의 ‘파인 다이닝’(최고급 식당)이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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