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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연말, 이름 없는 인사 문자에 성실하게 답하는 방법

등록 2018-11-21 20:24수정 2018-11-21 20:36

너 어디까지 해봤어?
클립아트코리아.
클립아트코리아.

연말이 다가오고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이름 없는 문자가 날아오면, 탐정 게임이 시작된다. “기자님 올 한해도 수고하셨어요.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문자열의 끝에 카카오프렌즈의 인기 캐릭터 ‘라이언’(곰처럼 생겼지만 사자라고 한다)이 고깔모자를 쓰고 빨간 하트를 날리며 등장한다. 나를 ‘기자’라고 불렀다는 사실과 발신 번호를 빼면 아무 정보도 없다. 이모티콘으로 짐작건대 여성일 가능성이 크지만, 예단할 순 없다. 라이언은 정황증거일 뿐이다. 스모킹 건을 찾아야 한다. 아직 철없던 시절이었다면 답장을 하지 않거나 “예, 덕분에 좋은 한 해를 보냈습니다” 정도의 답문으로 마무리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연말에 자신을 기억해준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것, 보내는 답장에 직함 정도는 써주는 것이 예의라는 걸 안다.

딱 한 번 마주친 사람이라도, 단 한 번도 못 마주친 사람이라도 좋다. 일단 찾아야 답문을 보낸다. 스마트폰의 검색창을 켜고 전화번호 뒤 네 자리를 검색한다. 뒷자리 검색에서 걸리는 경우가 의외로 꽤 있다. 사람들은 전화기를 잃어버리거나 하는 일로 번호를 바꿔야 할 때 앞자리를 바꾸지 뒷자리를 바꾸지는 않기 때문이다. 발신자를 찾아 “앗! 과장님 전화번호 바뀌셨나 봐요”라고 답문을 시작할 수 있다면 수사는 성공이다.

휴대전화 뒷자리로 정보를 찾을 수 없을 땐 명함첩을 꺼낸다. 프로세스를 입력한다. ‘일치하는 휴대전화 뒷자리를 찾으시오.’ 가끔 명함첩을 꺼내 본다는 건 재밌는 일이다. 회현동의 일본식 선술집에서 만났던 XX커뮤니케이션즈의 박 차장님의 얼굴을 오랜만에 떠올리고, 서촌의 화랑에서 만나 술잔을 나눴던 최 실장님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갖는다. 그러다 보면 빙고! 일치하는 번호가 등장하면 손가락에 최대한 정성을 담아 직함을 부른다. “실장님, 제가 깜빡하고 번호를 안 입력 해뒀나 봐요.” 명함첩에서 이름을 찾지 못하면 주변 사람들의 정보를 활용한다. “010-9XXX-3OOO가 누군지 알아?”. 이마저도 실패하면 구글의 힘이라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스페이스를 띄우고 전화번호 11자리를 입력한다. 여담이지만, 개인정보가 구글의 바다에 얼마나 자유롭게 떠다니는지를 알고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다. ‘XX 쇼핑 프로모션 당첨자 명단’, ‘XX 풋볼클럽 하계 친목회비 납부자 명단’ 등의 문서가 줄지어 뜬다. XX다이닝의 정 차장님이 등산 동호회 회원이라는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래도 못 찾으면 어쩔 수 없다. “죄송해요. 제가 저장을 안 해뒀었나 봐요”라고 정중하게 사과한다.

문제는 다음이다. 피상적 관계엔 이모티콘이 최고인데, 내겐 아직 외국어다. 어피치(카카오톡의 복숭아 모양 캐릭터)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이모티콘을 적절하게 쓸 수만 있다면, 리락쿠마(일본에서 만든 곰돌이 캐릭터)가 활짝 웃고 있고 주위에 노란 별이 반짝이는 이모티콘을 쓸 수만 있다면 가벼운 마음을 발랄하게 포장할 수 있을 텐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30대에 뉴욕으로 넘어가 다국적 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사고하고 대화한다는 건 항상 자기 지능 70%에 한계를 걸어두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모티콘 범람의 시대에 이모티콘을 쓰지 못하는 심정이 딱 그렇다. “예, 알겠습니다”라고만 적으면 어쩐지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처럼 들리고, “예, 잘 알겠습니다”라고 적으면 반항하는 것처럼 읽힌다. ‘오케이’라고 외치며 한 손을 번쩍 드는 그림 정도는 보내줘야 진짜 알아 들은 것으로 읽힌다. 주변 사람들이 이모티콘을 유창하게 보내는 걸 보면 관계대명사 절을 섞어 완벽한 영어 문장을 구사하는 다중언어 사용자만큼이나 경이롭다. 우리 편집부의 단체 창에서 20대 후배들은 거의 아무런 주저함 없이 당황과 분노가 섞인 표정을, 놀랐으나 기쁨이 한 조각 묻어있는 표정을 섬세하게 선택해 전송한다. 나도 하나 써볼까 노력도 해 봤지만, 적합한 이모티콘을 고르는 사이에 이미 딴 주제로 대화가 넘어간 경우가 허다하다. 낚시 못 하는 놈이 낚싯대 탓을 한다고, 휴대전화에는 결제해 놓은 유료 이모티콘만 5만원 어치가 넘는다. 그러면 뭐하나, 제대로 골라 보내지를 못하는 것을.

나처럼 이모티콘을 잘 못 쓰는 30·40세대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하는 게 물결무늬(‘~’)와 눈웃음(‘^^’)인데, 아저씨 티만 잔뜩 날 뿐이다. 아저씨라서 나쁠 건 없지만, 문자에서까지 티를 낼 필요는 없지 않나? “이대로 문자 아저씨가 될 순 없다”며 한 후배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가 좋은 충고를 들었다. “기본만 하세요. 기본만.”후배는 유니코드(운영체제나 프로그램 언어와 관계없이 각 언어를 고유하게 표현하도록 고안된 코드 체계)에 포함된 기본적인 이모티콘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찾아보니 어느 기계나 노랗고 동그란 얼굴(우리가 알고 있는 ‘스마일 페이스’)에 사람의 표정을 표현한 89개의 유니코드 이모티콘을 쓸 수 있다. 웃는 얼굴만 해도 ‘미소 짓는 얼굴’, '크게 뜬 눈으로 미소 짓는 얼굴’, ‘웃는 눈으로 미소 짓는 얼굴’,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짓는 얼굴’ 등 13종류다. 애플, 구글, 안드로이드, 윈도즈에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감정의 표현은 일관적이다. 세분된 89개의 감정.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올해는 연말 문자에 ‘웃느라 찡그린 눈에 희색이 만연한 얼굴’(유니코드 : U+1F604)을 주로 보낼 작정이다.

30대는 사람을 가장 많이 만나는 시기기도 하지만, 한 관계의 깊이는 상대적으로 얕은 시기기도 하다. “다음에 날 잡아서 꼭 봐요”라며 인사하지만, 정말인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 모두의 이름은 다른 누군가의 엑셀 시트 위에 회사명, 직함, 이메일 주소와 함께 적혀있다. 나를 관리하던 사람이 자리를 옮기거나, 내가 관리하던 사람이 자리를 옮기면 파일의 형태로 우리의 관계도 인계되거나 업데이트된다. 그래도 누군가를 새롭게 진짜로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피상적 대인관계에 직함을 찾아 비계(건축공사 할 때 세우는 임시 가설물)를 놓고 이모티콘으로 든든한 탑을 쌓는 것이야말로 완연한 중년을 앞둔 초보 아저씨가 해야 할 일이다. 아니면 말고.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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