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우리는 가끔 누군가에겐 꼰대가 된다

등록 2019-01-04 20:55수정 2019-01-10 17:42

너 어디까지 해봤어?
홍상수 감독이 만든 영화 <우리 선희>. <한겨레> 자료사진
홍상수 감독이 만든 영화 <우리 선희>. <한겨레> 자료사진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면 꼭 잔소리를 듣는다. “아니 어떻게 그 쓴 걸 마셔요?”라며 엄청나게 과장하며 놀라는 사람이 꼭 있다. “스타벅스는 원두를 로스팅한 상태로 미국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향이 새어 나간다”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 “에스프레소의 나라 이탈리아에는 스타벅스가 들어갈 엄두를 못 낸다”는 얘기도 들었다. 자기가 이탈리아 사람이야 뭐야! 일부 이탈리아 사람이 ‘에스프레소의 원조인 이탈리아에서 스타벅스가 웬 말이냐’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지난해 밀라노에 이탈리아 최초로 스타벅스 매장이 생긴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차라리 멕시코에 타코벨(미국의 멕시코 음식 체인점)을 차려라”라며 비아냥거린 사람들도 꽤 있었다. 타코가 원래는 멕시코 음식이라는 점을 들어 비꼰 것이다. 하지만 밀라노의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는 꽤 성황 중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허세의 욕구가 골수에 흐르는 나 역시 남 욕할 처지는 아니다. 그래서 지우고 싶은 기억이 참 많다. 오래전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2가 재밌다는 한 선배에게 “전 한국 드라마 안 봐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얼마나 재수 없었을까! 마치 한국 드라마는 전부 수준 미달이라는 듯, 나는 그런 드라마 안 보는 고매한 취향이라도 가진 것 마냥. 그래봤자 집에 가서 <빅뱅 이론>(미국 <시비에스>의 시트콤)이나 보는 주제인데.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5년 후에 너는 한국 드라마 없이는 살 수 없어!’라며 뺨을 세차게 갈겨주고 싶은 심정이다. 요새는 술을 마시다가도 〈SKY 캐슬〉 본방송을 사수하려고 모범택시라도 잡아타고 집에 들어간다. 대체 5년 전의 난 왜 한국 드라마는 안 본다고 뻐겼을까?

은연중에 다른 사람의 취향을 살짝 깔보는 건 결국 자기 취향을 슬쩍 뽐내는 수법 중 가장 만연한 방법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기자 선배는 영화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홍상수의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유·무언의 압박을 받는다고 한다. ‘빵 박사’이자 <허프포스트>의 기자 중 유일하게 뉴욕의 <미쉐린 가이드> 별 세개 레스토랑에서 식사해본 나름의 후배는 설렁탕을 먹으러 갈 때마다 자꾸 깍두기 국물을 부어 주려는 동석자들 때문에 귀찮아 죽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후배가 바로 나에게 “스타벅스는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나는 이 후배가 사석에서 넷플릭스의 <굿 플레이스>가 재미있다고 할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넌 참 그런 걸 좋아하더라”라고 피식 웃는다. 홍상수가 별로라는 영화 기자 선배는 나에게 “어떻게 <스타워즈>가 재미없을 수가 있어?”라고 악을 쓴 적이 있고, 나는 또 꽤 오래전에 그 선배에게 “그래도 한국 감독 중엔 홍상수가 제일 웃기다”라고 우긴 적이 있다. 우리가 숨기고 살아서 그렇지 까놓고 보면 가끔 취향 꼰대가 된다.

어쩌면 모두가 취향의 허세를 부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세상보다는 서로가 상대의 허세를 조금씩 봐주며 사는 세상이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취향을 뽐내려는 욕구가 누구에게나 조금은 있으니까. <와이어드>, <슬레이트>, <뉴욕타임스>에 기고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톰 밴더빌트는 <취향의 탄생>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넷플릭스를 찾았다가 제품 혁신 담당자로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설문을 해보면) 꽤 많은 응답자가 국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답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말로 하는 취향은 허세거나 자랑인 경우가 많다. <호텔 르완다>에 별 5개를 주고 <캡틴 아메리카>에는 별 2개를 주지만, 사실은 훨씬 많은 사람이 <캡틴 아메리카>를 본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저녁에 밥상에 앉아 켄 번스의 <베트남 전쟁> 10부작을 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저 ‘다큐멘터리 취향’이라고 별점으로 뽐내고 싶은 사람이 많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사석에서 나도 몇 번인가 “켄 번스의 <베트남 전쟁> 10부작 봤어? 정말 최고더라”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아직 5편까지밖에 보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최근에 끝까지 다 본 넷플릭스 영화는 <나 홀로 집에>고, ‘내가 찜해둔 콘텐츠’는 <황당한 외계인 폴>이다. 크리스마스였으니까, 라고 마지막 허세를 부려보고 싶다.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에디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간장에 졸이거나 기름에 굽거나…‘하늘이 내린’ 식재료 [ESC] 1.

간장에 졸이거나 기름에 굽거나…‘하늘이 내린’ 식재료 [ESC]

인간이 닿지 않은 50년 ‘비밀의 숲’…베일 벗자 황금빛 탄성 2.

인간이 닿지 않은 50년 ‘비밀의 숲’…베일 벗자 황금빛 탄성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3.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ESC] “12~14시간 공복은 건강 유지의 기본” 4.

[ESC] “12~14시간 공복은 건강 유지의 기본”

북집게, 끈갈피, 타이머, 기화펜…책에 더욱 손이 간다, 손이 가 [ESC] 5.

북집게, 끈갈피, 타이머, 기화펜…책에 더욱 손이 간다, 손이 가 [ESC]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