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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새콤한 귤껍질이 돼지를 만났을 때

등록 2019-08-14 20:12수정 2019-08-14 20:26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성읍칠십리식당’. 사진 백문영 제공
‘성읍칠십리식당’. 사진 백문영 제공

“휴가도 안 가냐?”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찮다”라고 답하곤 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진짜라지만, 여행의 절반은 맛집 탐방일 게 뻔한 나. 떠나기 전부터 혼자 먹는 한 끼가 걱정스럽다. “제주도에 함께 식사하고 오자.” 친구들의 말이 반가웠던 것은 이런 마음에서였다.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던져두고 서귀포로 향했다. 곧 제철인 청귤을 맛보고 싶어 농장으로 달려가는 길이었다. 제주의 맑은 하늘을 보자마자 신이 났다. 공항에서 산 앙증맞은 하우스 감귤을 까먹으면서 “귤이라면 역시 서귀포다”라고 외쳤다. 서귀포는 역시 듣던 대로 지천이 귤 농장이었다.

미리 약속한 청귤농장에서 귤 체험 행사를 즐기고 나니 어느새 해거름 잔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한 끼라도 식사는 제대로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서귀포 맛집’, ‘표선 맛집’을 검색해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일단 길 닿는 대로 가 보자.” 일행의 말에 표선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성읍민속마을로 차를 돌렸다. 관광지일 테니 맛집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돌아다니면서 간판을 구경했다. “여기까지 와서 고등어나 갈치 같은 것은 먹지 말자. 아무래도 관광지이니 가격도 비쌀 것이다.” 친구의 조언을 가이드 삼아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다 발견한 곳이 ‘성읍칠십리식당’이다. 제주 흑돼지를 전문으로 한다는 간판 문구가 믿음직했다. 내부는 한산했다. 불판에서는 기름진 연기가 연신 올라오고 있었다. 도란도란 정겨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흑돼지 오겹살 구이를 3인분 주문하면 한 상 가득 찬이 깔린다. 도시의 고깃집에서 기대할 수 있는 푸짐한 쌈 채소와 김치, 과일 샐러드, 데친 콩나물, 고사리가 함께 나왔다. ‘제주에서는 고사리를 고기와 함께 구워 먹는다더니 진짜구나.’ 새삼 놀라면서 돼지고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나온 고기는 왠지 달랐다. 3㎝는 가뿐히 넘을 것 같은 두툼한 두께였다. 이미 초벌구이를 해서인지 끝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는데,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귤껍질과 귤나무 장작으로 훈연해 더욱 담백한 맛을 낸다”고 직원이 설명했다.

불판에 고기를 늘어놓고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데친 콩나물과 이미 간이 슴슴하게 스며든 고사리나물을 함께 굽기 시작했다. 이윽고 구워진 고기를 고사리에 돌돌 싸서 입에 넣었다. 훈제 바비큐를 먹는 듯한 매콤한 연기 향! 멸치젓에 고기를 푹 적셨더니 짭조름하고 매콤한 향이 입안에 퍼졌다. “한라산 센 거 하나 주세요!” 나한테서 나온 소리일까? 친구의 흥분이었을까?

서울에서도, 지방에서도 늘 먹는 것이 고기라지만, 그 흔한 것이 고기라지만, 여행지에서 먹는 고기는 남다르다. 지역마다 먹는 방법은 다르다. 이 섬세한 차이를 발견하는 기쁨도 탐식가의 몫이다.

백문영(라이프 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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