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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폭신한 당근케이크에 빠진 날, 원수를 용서하다

등록 2019-11-28 09:40수정 2019-11-28 20:27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카페 세시셀라. 사진 백문영 제공
카페 세시셀라. 사진 백문영 제공

어떤 지역을 떠올릴 때 그곳에 있는 식당이나 카페가 제일 먼저 생각날 때가 있다. 언제 가도 늘 같은 메뉴로 나를 맞아주는 곳이다. 그런 곳을 방문할 때면 ‘이곳이 고향인가’ 싶을 정도로 푸근한 마음이 든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주변에는 패션 편집숍, 화려한 와인 바와 식당이 가득하다. ‘패션의 성지’이자 트렌드의 중심지라고 할 만한 곳이다. 이렇다 보니 각종 식당과 카페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부침이 심한 이 동네에서 10년 이상 한 자리를 지키는 식당이야말로 저력 있는 맛집이다. 디저트 카페 ‘세시셀라’가 대표적인 그런 곳이다.

도산공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세시셀라. 하늘색과 노란색이 엮인 문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파리 뒷골목 여행에서 발견했던 카페가 떠오른다. 이국적인 외관이다. 작은 문 뒤에는 흰 커튼이, 그 커튼 뒤에는 은은한 커피 냄새와 달콤한 케이크 향이 가득 떠다닌다. 이곳에 들어서면 매일 크리스마스이브를 기다리는 아이가 된 것만 같다. ‘진짜 좋은 카페의 정석은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세시셀라의 대표 메뉴는 ‘당근케이크’다.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판매하는 평범한 케이크가 됐지만, 10년 전 처음 이곳에 등장했을 때 당근케이크는 신기한 케이크의 대명사였다. 잘게 다진 당근을 케이크 반죽에 가득 넣은 뒤 크림치즈를 두껍게 바른 당근케이크는 황홀한 맛의 경지를 드러냈다. “당근도 싫고 단 케이크는 더 싫다”면서 어깃장을 놓은 이라도 한입 먹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시나몬 향, 당근의 달콤한 맛과 부드럽고 촉촉한 크림치즈의 조화는 상상 이상이다.

디저트보다는 술을 즐기는 성정에다가 카페보다는 술집을 드나드는 아저씨 취향이지만, 세시셀라는 예외다. 제대로 된 케이크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제과점에 가깝다. 독약처럼 쓰지만 고소한 아이스커피 한 모금과 당근케이크 한 조각이면 세상 모든 원수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특별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음식, 향수를 부르는 장소는 누구에게나 있다. 술집일 수도, 카페일 수도, 식당일 수도 있지만 사실 장소가 중요하지는 않다. 나에게만 있는 장소, 언제 방문해도 실패 없는 ‘그곳’은 존재 자체로 고맙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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