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영국과 미국 등에서 도시건축 연구자로 활동한 경신원 ‘도시와 커뮤니티 연구소’ 대표가 주거에 관한 에피소드 한 편을 보내왔다. 재산증식 등이 목적인 주택이 아니라 사람의 삶과 역사가 새겨지는 특별한 공간으로서 집의 가치에 관한 얘기다. 경 대표는 최근 <흔들리는 서울의 골목길: 밀레니얼과 젠트리피케이션>을 출간한 저자이기도 하다.
영국 런던 근교에 사는 여든세살 베라 마이슨은 방이 4개인 2층 단독주택을 관리하며 사는 게 이제는 힘에 부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아들과 딸이 결혼과 직장을 이유로 출가한 게 이미 20여년 전 일이다. 결혼한 뒤에도 근처에 살았던 자녀들 덕분에 뛰어노는 손자와 손녀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집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훌쩍 성장해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 넓은 공간이 더는 필요 없었지만, 그건 집을 바꿀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이 집은 세 아이를 키우고, 매년 봄과 가을이면 집 근처 가든 센터에서 사 온 꽃들로 정원과 집 앞을 단장하며 동네 주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공간이기 때문이다. 남편 버나드가 낡은 차고를 아들 폴과 함께 고치고 페인트를 칠하며 뿌듯해했던 기억과 딸 린에게 샤워 시설이 딸린 방을 주고 싶어서 차고 위에 새로 방을 만들면서 기뻐했던 모습이 남아 있는 이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집은 그들 부부의 일대기가 담긴 추억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의 힘은 추억을 겹겹이 쌓는 동시에 육체의 노화도 불러왔다. 그는 두 번의 고관절 수술 이후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수술을 두 번 하고 나니 계단 오르는 게 겁나더라고요. 남편과 함께 이 큰 집을 청소하고 정리해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베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 경제가 조금씩 회복되던 1960년대에 자신보다 5살 많은 버나드와 결혼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던 이들은 주택을 마련하기 위한 목돈을 모으려고 런던에 있는 버나드 어머니의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큰아들인 리가 태어나자 녹지가 풍부한 런던 근교에 새롭게 조성된 주거단지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런던 북부의 엔필드란 곳이다. 런던 주요 지하철 노선인 ‘피커딜리 라인’과 런던 교외로 나가는 기차도 지나가기에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이 지역 주택 가격은 런던 시내에 견줘 저렴했고, 당시 이들과 같은 젊은 부부들은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근교로 이주하는 일이 빈번했다.
“당시 영국 각지에서 온 젊은 부부들은 새로 조성된 주거단지로 이주했기 때문에 모든 게 낯설었지요. 서로 친구가 되고 싶어 했어요. 외로웠으니까요.” 비슷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던 그들은 서로 많은 것을 나눴다. 음식을 나눠 먹고, 아이들을 서로 돌봐주고, 필요할 때는 돈을 빌려주는 일도 많았다. 테니스나 볼링 같은 운동도 함께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커뮤니티가 형성된 셈이다. “그때는 정말 모두 가족 같았어요. 지금과는 달랐죠. 현재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잖아요. 한곳에 오래 머물려고 하지도 않죠.”
9년 동안 살았던 첫 번째 집은 자녀 셋을 키우기에는 좁았다. 이 가족의 두 번째 집이 바로 지금 사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30년 넘게 추억을 쌓아왔다. 베라의 세 자녀인 리와 폴, 린에게도 이 공간은 ‘고향’과도 같은 존재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에 린은 초등학교에 들어갔어요. 린이 학교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어찌나 예뻤는지 몰라요. 린의 결혼식도 이곳에서 했어요. 부케와 하객들에게 줄 꽃들을 직접 준비했어요. 거의 1주일 동안 퇴근한 후 매일 저녁 부엌에서 꽃을 만들었어요. 행복해서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웨딩드레스 입은 린이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요.” 추억이 집 곳곳에 촘촘히 박혀 있다.
베라부부와 린 부부와 린의 자녀들. 사진 베라 제공
이 집안과의 인연은 2000년대 초에 시작됐다. 나는 영국으로 유학을 간 이후 처음 홀로 맞은 크리스마스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유학생들이 가장 외로운 때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같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2002년 12월, 크리스마스가 며칠 안 남은 날이었다. 가뜩이나 날씨도 흐려 우울해하던 나에게 친구 폴이 말을 걸었다. “크리스마스 때 집에 안 가면 우리 가족과 함께 보낼래요? 부모님과 형, 여동생, 그리고 고모와 고모부도 함께 있을 거예요. 당신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특별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은데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때 베라를 처음 만났다. 그들은 정말 따뜻하게 나를 환영해줬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크리스마스트리 밑에는 가족들이 나를 위해 준비한, 내 이름이 적힌 선물도 놓여 있었다. 나도 준비한 선물을 슬며시 밀어 넣었다. 베라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와 푸딩을 먹은 후, 자정까지 피아노 연주와 각종 다양한 음악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어느새 나는 이 가족의 한 사람이 됐다.
아직도 그 공간을 기억한다. 베라가 심어놓은 키 작은 관목들이 있는 포치(porch·건물의 현관 바깥쪽에 튀어나와 지붕으로 덮인 부분)를 지나 현관문을 열면 나던 그 고소한 냄새, 활짝 웃으며 나를 안아주던 베라와 버나드, 왼쪽 거실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맞닿아 있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등을 말이다. 부엌에는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가 오븐에서 잘 구워져 있었고, 매시트포테이토를 포함한 다양한 채소와 크리스마스 푸딩,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같은 달곰한 디저트들이 준비돼 있었다. 이방인인 나조차 추억이 가득한 공간인 그 집을 수십년 산 비에라가 떠나기 싫어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린의 딸이 쓰는 방. 어머니의 손길이 깃든 방을 린이 자신의 딸을 위해 고쳤다. 사진 베라 제공
린의 집에 된 후 찍은 가족사진. 사진 베라 제공
최근 희소식이 들었다. 린이 그 집에서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린 부부는 때마침 자녀들에게 넉넉한 공간이 필요해서 이사할 집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가족의 추억이 듬뿍 담긴 집을 ‘버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세 남매는 우선 한마음으로 베라와 버나드가 거주할 수 있는 작은 단층주택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운 좋게 근처에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린의 집이 된 공간은 린의 스타일대로 새 옷을 입었다. 베라가 그랬던 것처럼 린은 아이들을 위해 커다란 창문에 블라인드를 달고, 테가 은은한 색인 거울을 마련했다. 앙증맞은 인형을 침대에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린이 베라의 역사를 이어 쓰고 있는 것이다. 폴과 리는 사라질 위기였던 그들의 ‘집’이 생존한 게 기뻤다. ‘집’이 그들의 곁을 떠나는 일은 단순히 거주지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모든 추억이 저 멀리 달아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폴이 전화기 너머 웃으면서 말했다. “이 집이 다른 사람에게 팔린다는 건, 생각만 해도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린이 사겠다고 했을 때 너무 고마웠어요. 린 부부와 조카들이 이 집에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집은 이런 공간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삶의 추억을 함께하는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 같은 낯선 이방인에게도 그 추억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다. 추억의 공간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최근 서울 아파트 가격이 치솟는다지만, 나는 베라의 집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경신원(도시계획전문·<흔들리는 서울의 골목길>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