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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빈 병 투척하지 마세요, 꽂으세요…쓰레기통도 디자인

등록 2020-04-24 10:23수정 2020-04-24 10:25

쌓여가는 플라스틱 쓰레기
수거하는 이들 보면 안쓰러워
디자인만 조금 바꿔도 편리할 터인데
쓰레기 수거함은 도시 설계 일부
독일 판트링 활용해 쓰레기 처리
독일의 공병 수거 관련 아이디어인 판트링. 사진 ‘마티아스 케츠 판트링’ 제공
독일의 공병 수거 관련 아이디어인 판트링. 사진 ‘마티아스 케츠 판트링’ 제공

영어에 ‘가비지 인, 가비지 아웃’(garbage in, garbage out) 라는 말이 있다. 컴퓨터 입력 값이 엉터리면, 나오는 값도 여지없이 쓰레기일 거란 뜻인데, 내가 이 문구를 배운 건 경기도 양주에서 풀무원농장을 하시던 고 원경선 원장님을 만났을 때다. 나쁜 식재료를 쓰면 절대 좋은 음식이 나올 수 없다는 의미다. 대학을 휴학하고 농장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해 찾았을 때, 선생은 잠언의 한 구절처럼 늘 이 말을 반복해 들려주었다. 뜬금없이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 건, 얼마 전 2리터 6개짜리 생수통 다발을 양손에 들고 낑낑대며 계단을 올랐을 때다. 맞은편 집 현관 앞에도 그런 다발 대여섯개가 물류창고마냥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저걸 날랐을 택배 아저씨를 안쓰러워하며 문을 여는데, 내 집 현관에 가득한 분리수거통이 눈에 들어왔다. 라벨 떼고 발로 밟아 납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페트병 더미를 보니 갑자기 해양생물도 생각나고, 미세플라스틱 기사도 떠오르고, 방글라데시의 플라스틱 쓰레기 산에 사는 아이들 이야기도 스치면서 마음이 갑자기 매우 불편해졌다. 겨우 요거 먹자고 이렇게 많은 플라스틱을 꾸기고 있는 내 형편이 참 갑갑하다.

그것들을 현관에 쌓아두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변명이다. 1층에 있는 쓰레기 수거함에 버리러 갔더니, 그 재활용 통도 페트병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바람이라도 좀 세게 불면 페트병이 사방에 흩어져서 날리는 등 가관이기 때문에 덧쌓을 수는 없다. 요즘 다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생수나 음료 소비가 늘어난 탓인 듯싶다. 음식 조리에는 수돗물을 쓰긴 해도 하루에 생수 한 통은 우습게 마셔버리는 바람에 현관이 난장판이 되는 건 자명하다.

전 세계 도시의 문제인 쓰레기. 사진 최이규 제공
전 세계 도시의 문제인 쓰레기. 사진 최이규 제공

에이 모르겠다, ‘나부터 살자’ 하고 밤중에 아파트 분리 수거실에 내려갔더니 늘 오는 할머니가 작은 수레에 페트병을 옮겨 담고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과부하 된 쓰레기통이지만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에겐 너무 깊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것들을 일일이 손으로 건져내는 모습을 보니, 도와드릴 만한 인성은 안 되고 그냥 왠지 죄송해서 다시 들고 돌아왔다. 일전에 한 번 거들려 했더니, 괜찮다며 도망치듯 가버렸던 기억이 있어서다. 저러다 통 속으로 빠지기라도 하면 어쩔까 싶었다. 구청에서 설치한 듯 보이는 재활용 통은 허술한 플라스틱판으로 만들어서 찢어졌는데,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손이라도 베이면 큰일이라는 쓸데없는 걱정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쓰레기통 디자인 스케치를 몇 개 끄적거렸다. 젊은이들도 롱 패딩으로 싸매고 다니는 추운 날에 굳이 노인들이 그것도 밤을 꼴딱 새워서 재활용 쓰레기를 모으러 다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검색해 봤다. 잠깐의 리서치지만 결론은 ‘이거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재활용 폐기물의 공급과 수요, 수거 비용, 처리 방식, 플라스틱과 병의 소재 등 많은 문제가 깔끔하게 분류되지 않은 휴지통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나는 경제학자도, 환경공학자도 아니니 이건 전문가들에게 떠넘기는 편이 좋겠다는 게 결론이다.

다만 이런 현실을 좀처럼 바꾸기 어렵다면, 당장 힘도 없는 어르신들이 조금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쓰레기 수거함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동네 곳곳이 쓰레기 전쟁이다. 우리 건물 아래층에도 얼마 전 감시 카메라가 달렸다. 버리고 도망가는 자를 향한 경고판은 살벌하다. 고소 고발에 대한 엄포는 기본이고, 진심을 담아서 앙갚음을 다짐하는가 하면, 공공장소에서는 절대 쓸 수 없는 험한 욕설도 버젓이 걸려있다. 사회적 비용이다.

미국 뉴욕 다세대주택의 쓰레기통. 사진 최이규 제공
미국 뉴욕 다세대주택의 쓰레기통. 사진 최이규 제공

종량제 정책도 동네 골목에 쌓이는 쓰레기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일단 폐기물량을 획기적으로 줄인 공은 크지만, 종량제는 꽤 치사한 아이디어다. 국가가 당연히 해결해야 할 업무를 개인의 책임과 경제적 부담, 스트레스로 떠넘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종량제 시행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상품 생산자의 책임과 재활용 시스템의 문제를 깊이 고민했어야 했다. 집 앞마다 자리 잡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안타깝게 볼 때마다 공무원들의 아이디어 수준에 놀란다. 일반 가정의 음식물 찌꺼기는 싱크대 그라인더로 분쇄해서 버리는 것이 맞다. 하수관 개선에 수십년이 걸린다면, 그동안이라도 어떻게 버리고 모을지 진지하게 디자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재활용 쓰레기통마다 적혀있는 구청 마크가 사단의 원인이다. 비슷비슷한 집들이 늘어선 동네라도, 각 건물의 사정이 똑같은 집은 하나도 없다. 쓰레기통이 놓일 공간의 크기가 다르고, 입주자의 수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다. 똑같은 쓰레기통을 만들어 일률적으로 설치하면, 당연히 ‘가비지 인, 가비지 아웃’이다. 책임을 지는 자세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방기하는 것이다. 쓰레기 수거함은 제품 디자인이 아니다. 거리의 일부로서 도시 설계이며, 건물의 일부로서 건축 디자인에 속한다는 인식 전환이 먼저 필요하다. 그저 대충 만들고 구청 마크 찍어서 나눠줄 것이 아니라, 가이드라인에 맞게 집주인이 책임지고 설치하면 관은 비용과 법률적 지원을 해주면 된다.

언제나 그렇듯, 소재는 중요하다. 우리나라 공공시설물에서 흔히 보이듯 1~2년도 못 가 다 부서지고, 다시 설치해야 하는 허접함은 곤란하다. 심지어 부직포로 만들어진 경우도 많다. 길고양이들이 물고 뜯어서 사방에 닭 뼈와 족발 조각이 널브러지는 골목길 상황을 예방하려면, 쓰레기통은 금고처럼 튼튼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해외 사례를 보면 실제 자물쇠로 채우는 경우도 흔하다. 정한 사람만 버릴 수 있게, 또 수거해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크기도 문제다. 건물 전체의 배출량을 측정해서 쓰레기 수거함의 크기를 넉넉하게 만들어야 한다. 집마다 냉장고가 커졌듯, 가정마다 배출하는 양도 늘었다. 쓰레기통을 설치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자체 면적뿐만 아니라 버리고 수거하는 사람 모두에게 여유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쓰레기 수거함을 쓰레기 버리기 쉽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머니들이 쉽게 쓰레기를 가져갈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쓰레기통은 치우는 사람의 편리함에 맞춰 만들어야 한다. 사진 최이규 제공
쓰레기통은 치우는 사람의 편리함에 맞춰 만들어야 한다. 사진 최이규 제공

친구가 참고할 만한 사례를 알려줬다. 독일 젊은이들이 고안한 판트링(Pfandring)이다. 재활용 쓰레기통이 너무 크면 병을 버리다가 깨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밤중에 수거하시는 이들이 다칠 수도 있다. 깜깜한 쓰레기통 속에서 헤매며 뒤적이는 것도 고역이다. 쓰레기통에 걸어 사용하는 판트링은 페트병 몇 개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게 디자인돼 있다. 쓰레기통에 페트병 등을 처박는 게 아니라, 판트링에 꽂으면 되는 것이다.

판트링 방식은 쓰레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버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 모두에게 이득을 준다. 내가 조금만 신경 써서 정리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사실이다. 집의 작은 변화, 쓰레기를 버리는 과정의 변화가 도시의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 물론 말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일등의 저력을 보여준 한국 사회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본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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