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와 어린이가 공존하는 사회는 다양한 이익을 창출한다. 런던의 한 공원. 사진 최이규 제공
프랑스가 전성기를 누리던 루이 14세 시대에는 국민의 평균 수명은 22살 정도였다고 한다. 유아사망률과 전염병을 고려하더라도, 무척이나 암울한 숫자다. 대중은 기아와 중노동, 추위와 착취에 시달리다가 기껏 스무해 조금 넘는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래 산다는 측면에서, 어쩌면 우리는 인류 최초의 경험을 하는 중일지 모른다. 여기서 의문스러운 점은, 왜 이런 태평성대에 마치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아이를 낳지 않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출산율이란 흔히 짐작하는 것처럼 살기 힘든 것과 비례 관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거의 30년 만에 예전에 다녔던 초등학교에 가본 적이 있다. 체육관도 들어서고, 운동장의 나무들도 우람해지고, 건물은 증축된 모습이었다. 학교 앞 거리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병아리 팔던 할머니, 솜사탕 아저씨, 핫도그 노점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엔 자가용들이 엉겨 붙어 주차되어 있다. 그 많던 문방구와 떡볶이 가게들, 오락실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학원이나 빈 점포뿐이었다. 아이들이 와글와글하던 거리에는 정적이 감돈다.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린이가 있는 가정이 밀집한 뉴욕 ‘어퍼 웨스트사이드’의 동네 공원. 사진 최이규 제공
힘들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하지만, 프랑스의 예처럼 출산율은 개인이 느끼는 삶의 무게와는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오히려, 역사가 기록된 먼 옛날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거리를 메웠던 아이들은 산업 구조가 낳은 결과일지 모른다. 우선 사냥과 농사의 경우는 명확하다. 협동이 필요하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고모, 삼촌, 손자, 증손자까지 모두 모여 살아야 유리하다. 노예도 그 일부다. 조선시대의 고고한 유학자들이나 독립선언문에서 자유를 부르짖었던 토머스 제퍼슨 등은 지금 보면 수십명의 노예를 부리던 무지막지한 위선자들이다. 인간이 착해져서 노예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농업사회가 끝났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다.
반면 공업과 상업 기반의 경제에서는 핵가족이 효율적이다. 전통적 농업사회와 달리 직업에 따른 가족의 이동이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임금에 의존하면서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의 가족 규모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더는 쪼갤 수 없을 것 같았던 핵가족 또한 이제 1~2인 가구로 보편화되고 있다. 지금의 경제 구조에 최적화된 가족 단위는 개인이다. 노트북 한 대와 허름한 차고만 있으면 혼자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어쨌든 명목적으로는 개인적 자유와 기회를 내세우는 성과주의 세상으로 우리는 어느덧 진입하지 않았나.
임대주택을 혼합한 영국 킹스크로스 도시재생 프로젝트. 사진 최이규 제공
가족이라는 커뮤니티가 사라지는 시점에서, 가장 확연한 문제는 인류가 수십만년간 지속해온 아이를 낳고 길러왔던 방식, 즉 재생산 시스템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난 몇 세기를 통해 쟁취하려고 노력해 온 자유의 이면은 무척이나 어둡다. 아이들이 사라진 골목길은 마치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숲처럼 공허하다. 100년 후 부산이 없어지든, 300년 후 대한민국이 사라지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굳이 나의 핏줄로 대를 잇는다는 게 뭐 그리 중한가? 비어있는 한반도에 동남아 사람들이든, 중동 사람들이든 들어와서 편히 살게 되면 그만이다. 문제는 바로 지금 우리가 아이들 없이 과연 잘 살 수 있는가,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사회가 마음의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른들이 심리적으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늙은이가 천진난만함과 동심을 기억하기 위해 아이들은 필요하다. 심리적 안정감이란 약자에 대한 보살핌이 전제된 사회에서 나온다. 그것이 와해된 사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인구의 변화는 자동으로 주택정책과 연결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인구정책과 특히 임대주택정책은 양쪽 모두 무엇이 가장 시급한가에 대해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인상이다. 지난 10여년간 투입된 저출산·고령화 대책 예산이 대략 200조라고 한다. 공무원들의 말 잔치를 고려해 150조라고 하자. 만약 이 재원이 아이를 낳은 가정에 무상임대주택을 제공하는 식으로 쓰였다면 어땠을까? 59㎡(18평) 아파트 한 채당 건축비를 1억으로 잡으면 150만호다. 한해 30만명의 신생아가 태어난다고 했을 때, 1~5살 아이를 둔 모든 가정에 무상임대주택이 돌아간다는 의미다. 1990년대 초 대량 공급되어, 몇 해 간 집값을 안정시켰던 수치와 비슷하다. 최소한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임대주택을 혼합한 런던 킹스크로스 도시재생 프로젝트. 사진 최이규 제공
물론 임대주택에는 문제도 많다. 우선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영구임대라는 개념을 없애야 한다. 대다수 국민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5년 내지 최대 10년 정도로 거주 기간을 제한해야 한다.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도 5~8년마다 집을 옮긴다. 주거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하는 개인이나 가족의 상황이 10년이나 20년 후에도 동일할 거라는 가정은 합당치 않다.
어떤 사람이 어디에 들어가 혜택을 누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시스템도 문제다. 지금의 복잡한 점수제로는 과연 내가 자격이나 되는지, 내 차례가 언제 돌아올지 가늠조차 힘들다. 절차가 복잡하면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신혼부부 주택 같은 어처구니없는 범주도 없애야 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도 급속히 느는 세상이다. 선별적 복지가 필요한 그룹에는 현금으로 지원하고, 임대주택 입주 조건은 출생신고서 한장으로 제한하면 어떨까.
인구문제와 임대주택 공급이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이유는 집적과 규모의 경제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집들은 모여 있어야 제 기능을 한다. 핵가족제도는 엄마와 아빠에게 자녀의 양육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떠맡긴 잔인한 방식이다. 우울증과 다툼, 피곤과 짜증은 지금의 부부, 특히 맞벌이 부부에게 지옥과 같은 통과의례다.
입주 절차가 비교적 간단한 미국의 임대주택. 사진 최이규 제공
출산율 감소로 가족간의 거리가 멀어지자 커뮤니티 육아의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우리는 비록 만신창이지만 그런 터널을 통과해 왔다. 이제 핵가족조차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에서 답은 하나인 듯하다. 높은 밀도로 집적된 집단양육체제다. 파푸아뉴기니의 모계사회에서는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아이는 엄마와 이모들, 그리고 여럿의 아빠 가능성이 있는 삼촌들이 같이 키우기 때문에 육아 스트레스가 덜하다.
집단양육체제란 커뮤니티 육아를 위한 인프라의 구축이라 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이가 모여 사는 임대아파트 단지를 상상해 보자. 우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인내심의 폭이 커진다. 높은 집적도를 통해 각종 육아 관련 서비스의 다양성과 질이 올라간다.
인구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출산 가정의 주거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정책은 인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의 단초가 될 수 있다. 특정 계층에 대한 두루뭉술한 지원책은 지원금 타내는 데 노하우를 쌓은 선수들에게만 유리할 수도 있다. 열심히 일하는 청년들은 그런 걸 찾아다닐 여유조차 없다. 출산 장려 정책은 불투명한 지원금들을 정리하고, 임대주택이 가야 할 방향과 명확하고 단순하게 결합해야 한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