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세상의 모든 ‘빠꼼이’에게 축복을

등록 2020-02-14 11:13수정 2020-02-14 11:48

박세회의 사람 참 어려워
음식 ‘빠꼼이’는 소금 같은 양념도 질을 따진다. 박미향 기자
음식 ‘빠꼼이’는 소금 같은 양념도 질을 따진다. 박미향 기자

꽤 높은 지위까지 오른 한 선배의 이야기다. 그 선배의 모친은 애초 요리에는 큰 관심도 없고 커리어를 관리하느라 요리를 익히거나 연습할 겨를도 없어 기꺼이 집밥을 포기하고 사는 딸에게 “요리에 미친 사람 하나를 꼭 가까이 두고 사귀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요리에 미쳐서 집에서 반찬을 한 소쿠리씩 하는 사람, 친한 친구에게 자기가 맛본 음식을 맛보여 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세상에는 반드시 있으니, “그 사람과 친하게 사귀어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좋은 음식을 얻어먹고 맛있는 식당에 다닐 수 있다”는 충고다. 이 얘기를 조금 확장하면 이렇다. 사람이 모든 걸 잘할 수는 없으니, 자신에게 모자란 방면에 재능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을 곁에 둘 것. 인생의 지혜가 담긴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내 지인 중에도 음식과 요리에 미친 사람이 여럿 있다. 건강한 감칠맛에 푹 빠진 한 친구는 가끔 소금을 레몬과 각종 향신료에 1~2주 재운 후 그 진액으로 시금치, 고수, 미나리, 참나물 등의 페스토를 만든다.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하는 또 다른 친구는 기장 멸치로 안초비를 담근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기 힘들다. 멸치 액젓의 나라에서 ‘안초비’라니, 이 무슨 이탈리아 사람이 나폴리에서 메주 쑤는 소리란 말인가? 하긴 뉴욕에 살면서 제대로 된 평양냉면이 정말 먹고 싶어서 직접 육수를 내서 장충동 계열의 맛을 완벽하게 재현한 친구도 있으니, 세상에는 정말 뭔가에 미친 사람들이 많다.

물론 요리나 음식에 미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서울 시내의 전시란 전시는 모두 보고 다니는 선배, 대학로 뮤지컬과 연극의 초연과 마지막 공연을 다 보고 다니느라 월급의 반을 쓰는 후배가 있다. 신차가 나오면 휴가를 내서라도 시승을 해보는 친구가 있고, 전자기기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스마트폰이며 이어폰을 사재끼는 친구도 있다. 한국 소설 신작이 나올 때마다 출판사나 대형 서점에서 준비하는 ‘작가와의 만남’에 절대 빠지지 않고 찾는 친구도 있고, 여자 배구 경기를 보기 위해 한 달에 두세 번씩 연차를 내고 수원체육관으로 출퇴근하는 친구도 있다.

이 친구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다들 좀처럼 입을 쉬게 두질 않는다. 배구에 미친 친구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별로 관심도 없는 현대건설 배구팀의 선수들의 이름을 다 읊어가며 전도하려 든다. 자동차에 미친 친구와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새로 나온 ‘아우디 A6’의 듀얼 터치스크린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대해 한참 강의를 들었다. 소금을 레몬에 재운 친구는 밖에서 먹는 음식마다 간이 강하다, 향신료 밸런스가 잘못됐다며 투정을 부린다. 기장 멸치로 안초비를 담그는 친구는 이탈리아 여행 몇 번 다녀오더니 자기가 이탈리아 요리사인양 이탈리아 ‘요리부심’(요리+자부심)을 부린다. 본인이 만든 음식도 아니면서 “이탈리아 요리는 프랑스 요리와는 달리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다”며 자식 자랑하듯 의기양양해 한다.

뭔가에 빠져 안달 난 친구들의 설명을 들어주는 건 인생을 위한 투자다. 친구가 선물로 준 레몬 소금은 그냥 레몬에 소금을 담근 게 아니었다. 월계수 잎, 팔각, 검은 후추를 넣어 향을 입혔다. 그 진액으로 만들었다는 고수 페스토는 또 얼마나 대단했던지, 스파게티를 삶아 말 그대로 비비기만 했는데 신세계가 열렸다. 포틀랜드에 여행 갈 일이 있어 뉴욕에서 냉면 만들어 먹은 친구에게 추천 맛집을 묻자, 8개의 분류로 나눈 32개의 식당을 구글에 찍어주고 중요도를 나눠가며 약 한 시간에 걸쳐 설명했다. 뭔가에 미친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면 누릴 수 없는 기쁨이다. 물질적 풍요가 전부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친구들을 ‘빠꼼이’라 부른다. ‘빠꼼이’는 국어사전에는 은어로 등재되어 있지만, 소설에는 ‘어떤 영역에 대해 모자람 없이 두루 섭렵한 사람’의 뜻으로 자주 등장한다. 남들은 ‘설명충’이라 부를 그 사람을 나만의 빠꼼이로 받아들이는 순간 내 취향의 색은 좀 더 선명해지고 경험의 폭이 더 넓어진다. 생각해보면 나라는 사람은 내가 사랑한 주변의 빠꼼이들이 칠한 그림이다. 이탈리아 빠꼼이가 만든 안초비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포틀랜드 빠꼼이가 알려준 정보에 따라 여정을 잡는다. 자동차 빠꼼이가 추천해준 차를 타고, 연극 빠꼼이가 추천해준 공연과 영화 빠꼼이가 추천해준 영화를 본다. 돈과 시간을 들여 우리가 모르는 것들을 먼저 공부하고 경험한 세상의 모든 빠꼼이에게 축복 있기를.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에디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ESC] 비만과 광기의 역사 1.

[ESC] 비만과 광기의 역사

가방에 대롱대롱 내가 만든 인형…“내 새끼 같아” [ESC] 2.

가방에 대롱대롱 내가 만든 인형…“내 새끼 같아” [ESC]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3.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 746자

이 정도는 괜찮아, 호텔은 안 알려주는 ‘슬기로운 이용팁’ 4.

이 정도는 괜찮아, 호텔은 안 알려주는 ‘슬기로운 이용팁’

귀신들은 왜 이리 나를 좋아할까 5.

귀신들은 왜 이리 나를 좋아할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