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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거절의 펀치를 견뎌내는 방법

등록 2020-05-08 16:52수정 2020-05-08 17:46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섭외 전장에서 거절을 밥 먹듯 당하는 건 패션 잡지사 에디터의 숙명이다. 취재 리포트를 잘 쓰고, 알찬 기획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주가 상승 중인 연예인을 섭외하고 잘 나가는 스태프를 꾸려 아름다운 화보와 읽기에 즐거운 인터뷰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면을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는 휴대전화에 저장한 연락처를 무기 삼아 화보 섭외의 전장을 종횡무진 하는 전사다. 집에서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에 띄는 배우를 발견하면 전화기부터 잡는다. 그 배우 매니저의 연락처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최근에는 <부부의 세계>가 방영된 첫 주에 휴대전화를 두드리며 예감했다. 이제 곧 대규모 섭외 전투가 펼쳐지겠구나.

전사의 필연은 상흔이다. 기획회의가 끝나면, 하루에도 몇 번씩 거절당하며 상처를 입는다. 나는 전에 없이 치열했던 <밀회> 전투를 기억한다. <밀회>가 당시로서는 드물게 케이블 및 종편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자 그때 내가 몸담고 있던 패션 잡지 피처 소대에게 ‘밀회팀을 잡아라’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피처 소대의 일병 소총수였던 나는 재빨리 주연 배우인 김희애와 유아인은 물론이고 박혁권, 심혜진 등 거의 모든 출연 배우들의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대답은 전원 거절. 갑질을 한 이도 없었다. 매니저들의 말투는 상냥했다. 저마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거절은 충격이었다. 상처 하나 없이 피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날 집에 돌아와 당시엔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아내와 위스키 한 병을 비웠다.

“이런, 스케줄이 안 되시는군요”라며 훌훌 털면 그만일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거절은 마치 유령이 날린 펀치처럼 정신을 흔든다. 한두 번 흔들리다 보면 마음이 작아지고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러다가 매니저들이 날리는 펀치 드렁크가 일정 수준에 이르러 자신감이 완전히 파괴되면, 마치 상처 입은 맹수처럼 겉돌기 시작한다. 정상급 연예인의 소속사에 전화를 걸 때면 빈 회의실을 찾거나 건물 밖으로 나간다. 거절당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이 되면 거절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가장 큰 데미지를 입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데미지를 피하지 않기 위해 이메일로만 섭외하는 선배도 있다. “적어도 육성으로 거절을 당하진 않으니까”라는 게 그 선배의 이유다.

거절은 패션 잡지사 에디터만 겪는 일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거절을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백 통 전화를 거는 보험사 텔레마케터들, 자사 상품을 판촉하기 위해 전국을 도는 영업사원뿐이 아니다. 투자 유치를 준비하는 스타트업의 대표, 광고 입찰을 따내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대행사 부장님, 모두 거절을 먹고 산다. 그런 우리에겐 거절의 펀치를 견디는 힘이 중요하다.

거절을 이기는 법을 배운 사람이 있다. 20년 넘게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어머니는 몇 해 전 갑자기 콜센터에 취직했다. 어머니에게 “거절당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나를 싫어서 거절한 게 아니니까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유명 패션지의 한 선배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선배는 “이제 거절에 상처받지 않는다”라며 “상대방이 나를 거절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나를 거절한 거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더니 이제는 거절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흘릴 수 있게 되었다”라고 했다. 선배의 명언은 이어졌다. “거절당하는 게 일의 일부일 뿐이라는 걸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자 맘이 편해지고 힘이 났다.”

‘거절이 일의 일부일 뿐이라는 걸 객관적으로 본다’라는 말에 방점이 찍힌다. 6월호에 실릴 ‘명상’(Mindfulness)에 대한 리포트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사티파타나’는 자신의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석가모니의 수행법 중 하나다. 이 수행을 숙련하면 불안, 분노, 우울 등 내면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도 사로잡히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앞서 말한 선배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몰랐지만, 일로 일어난 감정을 자신의 방식대로 객관화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열정을 불태우는 일은 분기에 한 번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도 했는데, 중요한 얘기다. 나 역시 팀원들에게 말을 한다. “우린 섭외 노력만으로도 월급 받을 가치가 있다. 꼭 섭외에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끔만 하자.” 오늘도 거절을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 다짐한다. 꼭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은 이효리나, 방탄소년단이나, 봉준호 감독을 섭외할 때만 갖자. 봉준호 감독님 사랑합니다. 다음 분기에 연락드릴게요.

박세회(<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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