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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회식 119원칙, 내 관습 사전에 기록하다

등록 2020-05-22 13:30수정 2020-05-22 13:45

박세회의 사람 참 어려워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주로 거실 티브이(TV) 앞에서 식사하는데, 이때 볼 마땅한 콘텐츠가 생각나지 않으면 주저 없이 미국 ‘컬럼비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CBS)의 시트콤 〈빅뱅이론〉을 틀어놓는다. 2007년 첫 방영 이후 12개 시즌 동안 인기리에 방영되며 ‘시청자 수 1800만’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시리즈로, 어느 에피소드든 틀어두기만 하면 20여분을 즐겁게 소비할 수 있다. 〈빅뱅이론〉의 주역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배우 짐 파슨스가 연기한 아이큐 187의 천재 이론 물리학자 쉘든 쿠퍼 역이다. 쉘든 쿠퍼는 강박적이며,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과학과 이성만을 신성시하지만, 사랑스러운 너드(nerd·지능은 높지만 사회적인 부족한 괴짜) 캐릭터로 웃음을 자아내며 시즌 내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감 능력의 결여다. 그는 이웃인, 배우를 꿈꾸는 치즈케이크 팩토리의 웨이트리스 페니에게 “전문대학도 나오지 못한 시골 출신으로 동네 레스토랑에서 아직도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처지”라고 말해놓고, “사실 그대로 얘기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남자다. 그런 쿠퍼지만, 따듯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누군가 끔찍한 일을 당하거나, 크게 낙담했을 때 정해진 루틴에 따라 뜨거운 차를 내주며 “오, 이런!”이라고 말하고 등을 토닥여준다. 이는 공감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쿠퍼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존재인 엄마가 교육을 통해 주입한 사회적 관습에 따른 행동이다. 쿠퍼의 엄마가 누군가 낙담하면 반드시 차를 내어주며 등을 두 번 두드리고 “오, 이런!”이라는 공감의 제스처를 취하라고 훈련한 덕에 튀어나온 행동이다.

어차피 사람이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완벽하게 알기란 불가능하다. 쿠퍼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사회적 관습에 대한 학습과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우린 ‘이 정도면 예의 차린 셈’이라고 정한 사회의 룰에 따라 자유를 누린다. 아침에 회사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나누고, 결혼식에 갈 때는 친한 사람에겐 10만원, 덜 친한 사람에겐 5만원을 축의금으로 내자는 아주 느슨한 약속들이 있기에 눈이 마주쳤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고, 결혼식 축의금 때문에 고민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회적 관습이 변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세대와 세대 사이에 관습이 다르다면 나는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지난 2018년 11월부터 두 주에 한 번씩 연재한 ‘사람 참 어려워’는 내 나름대로 변해가는 관습의 속도를 열심히 좇아보려는 노력이었다. 예를 들면 ‘2018년 회식 트렌드 119원칙 아시나요?’라는 기사를 쓰면서 좋은 회식 장소를 선택하는 조건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음식점 화장실의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다. 회식하는 음식점의 화장실은 남녀 분리가 잘 되어 있는지, 실내에 있는지, 청소 상태가 양호한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내 머릿속 사회 관습 사전에 ‘회식 장소를 선택할 때는 반드시 화장실을 체크한다’를 써넣었다. 또 회식 때 “119(1주일 전 공지·1차에서 마무리·9시 전에 종료)는 꼭 지켰으면”, “평소 못한 말 허심탄회하게 하자고 해놓고 부장님만 허심탄회한 거 금지”라는 말도 이때 처음 들었다. 관습 사전에 ‘회식에 2차는 없다’고 적는다.

또 다른 주제를 취재하다가 대학 신입생들이 새 학기 초반에 ‘밥약 전쟁’을 치른다는 사실도 알았다. 2000년에 새내기였던 나는 수업도 안 들어가고 과방에 죽치고 앉아서 아무 선배나 붙잡고 미스터피자나 아웃백에 가자고 졸랐던 세대다. 반면 요새는 ‘선배도 학생인데 돈이 많을 리가 없다’는 문화가 번져 호감 가는 선배와 식사 약속을 잡기 위해 며칠을 고민해 겨우 문자를 보낸다고 한다. 관습 사전에 ‘요새 대학생들은 배려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적어 뒀다. 기사 작성 후 뉴스 페이지 댓글 창에서 가장 논란이 컸던 변화 중 하나는 ‘마이크로 짜증 유발자’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코로나19가 퍼지기도 전이었으나 ‘위생에 무심한 사람들’의 작은 행동들이 여러 사람에게 미세하지만 강렬한 짜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립스틱이나 립밤을 빌려줬더니 입술에 대고 바로 눌러 쓰는 사람’, ‘먹던 군만두를 한입 베어 물고 간장 소스에 다시 찍는 사람’, ‘화장실에서 용무를 마치고 세면대를 그냥 지나쳐서 나가는 사람’은 이제 어디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

2018년 11월부터 격주로 34개의 칼럼을 쓰며 수많은 사람 각자가 생각하는 관습에 대해 듣고 나만의 관습 사전을 업데이트했다. 생명이 다한 신조어는 절대 쓰지 말 것. 의사소통을 잘 못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니 이모티콘을 남용하지 말 것. 후배들과 술자리에서 술값을 다 내는 선배는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가끔은 나눠 낼 것. 부대찌개를 먹을 때는 반드시 라면 사리를 집는 공용 젓가락을 따로 둘 것 등이 업데이트되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다짐이 하나 생겼다. 이성이 작동하는 날까지 사회의 관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계속 살피며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 그건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다. <끝>

박세회(<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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