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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칼럼] ‘순백의 피해자’는 없다

등록 2020-04-02 09:30수정 2020-04-02 14:23

허지웅의 설거지2
영화 <7인의 사무라이>의 교훈
‘순백의 피해자’는 그저 판타지일 뿐
나쁜 피해자 착한 피해자는 없어,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
최근 n번방 성착취 피해자들 조롱하는 일부
그런 것 따지는 사이 피해자는 유기돼
“n번방 피해자들 적극적으로 보호, 관련자 전원 처벌 촉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이야기에 앞서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면 하나를 함께 나누고 싶다. 내 인생 열가지 장면 가운데 하나다. 평화롭게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민 부락이 있다. 어느 날 도적떼가 들이닥친다. 사람을 죽이고 재물과 곡식을 빼앗는다. 매번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털어가 버리니 농민들은 살아갈 수가 없다. 장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한다. 결국 사무라이를 고용해 도적떼를 물리쳐보자는 계획을 세운다. 없는 살림에 돈을 모아 일을 부탁할 사무라이를 찾아 떠난다. 돈이 부족해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농민을 돕는 일이라는 대의가 사무라이들을 움직인다. 우여곡절 끝에 사무라이가 모인다. 7명이다. 7인의 사무라이가 마을에 도착한다. 사무라이들은 도적떼에 맞서 어떻게 싸우면 좋을지 농민들을 가르친다. 전략을 세우고 부족한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그러다 사무라이 일행 가운데 한명이 한가득 숨겨져 있는 무기를 발견한다. 사무라이들은 격노한다. 그것은 그간 농민들이 떠돌이 사무라이들을 죽이고 빼앗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당시 말로 오치무샤라고 한다. 패잔병, 낙오 무사라는 의미다. 전장에서 지고 떠돌이 신세가 된 사무라이들은 곧잘 농민들의 표적이 되어 죽임을 당했다.

격분한 사무라이들이 일을 그만두고 돌아가겠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은 낙오 무사가 되어 죽창에 쫓겨보았다면서 이 마을 놈들을 베어버리고 싶어졌다는 말도 나온다. 그때 미후네 도시로가 콧방귀를 낀다. 그리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그는 사무라이 무리들 가운데 유일한 농민 출신이다.

“거참 가관이로군. 너희들 농부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걔들이 무슨 부처인 줄 알아? 웃기지들 말라고, 농부만 한 독종이 또 있는 줄 알아? 쌀 내놓으라고 해봐, 보리 내놓으라고 해봐! 다 없다고 할걸? 하지만 있지, 없는 게 없을걸? 마룻바닥 뜯어내고 파보시지그래? 거기에 없다면 다음은 헛간을 뒤져봐. 나오고말고. 암, 나오고말고. 벽 속에 숨겨놓은 쌀, 소금, 콩, 술, 저기 한 번 가보란 말이야! 거기에 다 숨겨놓았다고! 선량한 얼굴을 하고선 넙죽거리면서 거짓말은 잘도 치지! 모든 걸 속이려 들어. 어디 전쟁 났단 소리를 들으면 죽창을 만들어 들고선 오치무샤 사냥을 하지! 내 말 잘 들어. 농부란 말이지. 농부란! 참을성 없고!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고! 울보, 심술쟁이, 머저리에, 살인자라고! 제기랄, 웃겨서 눈물이 다 나오는군.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도대체 그런 괴물을 만들어 낸 게 누구야. 누구냔 말이야? 네놈들이라고, (전쟁을 일삼은) 바로 사무라이라고! 이 나쁜 자식들아!”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사무라이들은 빠르게 뉘우친다. 마을 사람들과 단합한 7인의 사무라이는 도적떼와 결전을 치른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을 지켜낸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는 그런 영화다.

4년 전 <한겨레> 지면에 ‘순백의 피해자’라는 글을 기고한 일이 있다. 애초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비난 여론을 보며 만든 개념이었다.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순결 판타지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피해자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한다.

성착취 텔레그램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다. ‘사람의 몸은 사거나 팔 수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 하나 마나 한 빤한 이야기로 치부되는 수준을 넘어, 더 이상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죽은 말로 전락했다.

처벌에 관해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매사 우리 생각대로 양형을 정하고 단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법치 없는 정의는 반드시 세상을 망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 더욱 엄정한 처벌과 법적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적어도 미성년자의 몸에 가해진 성범죄에 대해서는 예외 없는 무기징역이나 그에 준하는 형벌이 필요하다. 그렇게 양형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런 명백한 경고 지점을 통과하고도 바꾸지 못하면 한국은 망한다.

수사가 완료되면 남성 가해자들이 저지른 이 끔찍한 범죄의 이면에 어떤 비뚤어진 심리가 있었는지 우리 사회가 함께 모여 고민하고 대화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당장 급한 건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스폰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문제다”, “일탈 계정을 운영했다는 시점에서 이미 틀렸다”는 등의 말이 나온다. “내게 딸이 있다면 엔(n)번방 근처에도 가지 않도록 평소 가르치겠다”는 교수도 나왔다. 어느 유튜버는 “엔(n)번방 피해자들 잘됐다”는 영상을 제작해 공개했다. 피해자들의 신상 정보를 추적하는 한편 조롱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요컨대 피해자들이 금전적 이익을 바라고 접근했다가 걸려든 것이기 때문에 자업자득이라는 이야기다. 혹은 아주 순전한 형태의 피해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나 순수한 피해자인지 측정해보았더니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이다. 그런 걸 측정할 수 있는 권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청년들은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누군가의 속내를 쉽게 측정할 수 있다거나 특히 순수성과 양심을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주의해라. 그런 자들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입체적이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다. 착한 피해자도 나쁜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불필요하다. 그런 말을 하는 자에게는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숨은 의도가 반드시 있다.

피해자에 특정한 이미지와 표정을 덮어씌우려는 것은 한국사회의 순결 콤플렉스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쁜 피해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착한 피해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큰 해악이다. 트집을 잡고 깎아내려 나쁜 피해자를 만들어내려는 욕망만큼이나, 그 반대지점에서 착하고 선량하기만 한 피해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도 또한 불쾌하고 해로운 것이다. 저 두 축이 옳고 그름을 논하며 피해자의 진짜 얼굴은 이거라고 다투는 동안 정작 피해자는 유기된다.

다시 말하지만,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걸 측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미후네 도시로의 일갈에 다른 사무라이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정의롭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던 자신들의 동기가 얼마나 얇고 편협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쌍한’ 농민들을 돕기 위해 호기롭게 뭉쳤다. 그런데 선녀 같고 부처 같은 줄 알았던 농민들의 표정이 알고 보니 제각기 모두 다르다. 그들은 ‘사람’이다. 왜 선녀가 아니고 부처가 아니고 사람이냐며 난동을 부리려던 사무라이들은 미후네 도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며 피해자에게 어울리는 표정을 찾고 있었던 사무라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함께 싸워 이긴다. <7인의 사무라이>는 그래서 공정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n(엔)번방 피해자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보호와 더불어 엄정한 수사와 관련자 전원 처벌을 촉구한다.

허지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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