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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장마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당신에게

등록 2020-08-13 06:00수정 2020-08-14 09:05

그해 장마는 기상청 예측과 달리 몰아쳐
막차 놓친 나, 주머니엔 한 푼도 없어
원망과 증오, 불행으로 우울했던 당시 24살 나
모든 것 비우자 찾아든 삶의 ‘안심’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두 시간쯤 걸었을까. 후회가 들었다. 다리 밑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망가진 우산살을 펴려다가 바닥에 집어 던진 참이었다. 그해 장마는 기상청이 보유했다던 슈퍼컴퓨터로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인지 예보와는 상관없이 간헐적 돌풍과 폭우를 동반했고, 막차를 놓친 스물넷의 주머니에는 집까지 갈 택시비가 없었다. 아니, 체크카드에는 돈이 있었으나 2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으므로 집까지 걸어가 보자고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하루에 6600원 정도를 사용해야 했으나 방금 나는 친구들과 마신 술값을 긁었다.

마침 합정이었고, 양화대교가 있었고, 한강을 따라 해가 뜰 때까지 걸으면 집 근처 중랑천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취기와 맞물렸다. 가슴과 머리가 무거우면 무작정 걷고 보는 습관도 습관이었지만, 처음이라서 서툴 만큼 서툴렀던 이별은 여러모로 마음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몸을 혹사하는 방식으로 마음의 숨을 가라앉히고 집에 도착해서 죽음 같은 잠을 자고 싶었다. 불어난 수위가 아슬아슬했으나 한강이 넘칠 리는 없다는 생각에 걷기 시작한 후 한시간쯤 지났을까. 장마가 다시금 머리를 풀어헤쳤고, 메고 나왔던 낡은 백팩의 어깨끈이 끊어지더니 우산까지 망가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대로 가면 죽을 수도 있다.

가방을 버려야 한다. 휴대전화. 남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나 나는 여전히 모토로라 폴더폰을 쓰고 있었으므로 지도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왜 스마트폰의 투박하고 멍청한 디자인을 용납할 수 없었을까. 진즉에 살걸!) 그러나 비상시에는 구조 요청이라도 해야지. 휴대전화를 바지 앞주머니에 넣는다. 지갑. 현금은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지갑은 성인이 된 기념으로 엄마가 사준 무려 ‘버버리’다. 물론 짝퉁인 걸 누가 알려줘서 지난해 즈음 눈치를 챘지만, 버릴 수는 없다. 지갑은 뒷주머니로. 이미 젖어서 손쓸 수 없게 된 몇 권의 책들.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시를 쓰는 이들 사이에서 큰 유행이었다. 그러나 촛불 따위가 물을 이기겠나. 다시 사면되니까 이건 버려도 돼.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이걸 읽는 재미에 빠져 시간이 빌 때마다 한적한 강의실을 찾기 바빴다.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지만, 다 읽었으니까.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아…. 이건 안 돼. 물에 떠내려가도 최승자는 안 된다. 이분은 이미 실존과 영혼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시집은 얇고 가벼우니까 노름꾼이 판돈을 숨기듯 허리춤에 찔러 넣는다. 미니 성경. 오 주여…. 나는 불성실한 교도였으나 작은 성경을 늘 가방에 넣고 다녔다. 교회를 완전히 등지게 된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나는 주일학교를 성실히 다녔다. 어쩌면 당시 그 사태는 신의 길을 거역한 자를 향한 신의 분노였을까. 아니다. 그는 그렇게 속이 좁지 않으시다. 그러나 성경을 버리는 건 어쩐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 뒷주머니에 억지로 구겨 넣는다. 남은 필기구와 다른 잡동사니는 이미 물에 젖어 망가졌다. 버려야 할 건 버려야 한다.

다리 밑을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는 걷다가 보이는 가장 가까운 도로로 올라가 택시를 잡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여기가 어디쯤인지, 도무지 강변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보다도 길눈이 훨씬 어두웠고 새벽 세시와 네시 사이,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극한의 위기 속에서 생명은 고유의 방어체계를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얼마를 더 걷자 마치 마라토너가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처럼 불현듯 상쾌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완전히 망가지자 더는 나빠질 게 없었다. 먼저 엉덩이를 불균형하게 짓누르던 뒷주머니의 성경을 버렸다. 구원은 스스로 구원하는 자의 것이니까. 최승자는 이미 퉁퉁 불어 책의 형태를 잃은 지 오래였다. 휴대전화는 침수되었는지 작동하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발이 헛돌아 아프던 단화도 벗었다. (강가에 가지런히 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누군가에게는 어떤 이가 강물로 뛰어든 흔적처럼 보였을까 싶어 미안하다.)

맨발로 걸었다. 그러나 모든 게 괜찮았다. 도망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과거에서 온 후회와 미래를 향한 불안이 빗물과 함께 반죽이 되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생각과 감정의 농도는 들이닥치는 빗물에 섞여 묽어지다가, 쓸려 내려가서 결국 깨끗하게 비워졌다. 낮에만 해도 여러 번 죽음에 닿았던 생각이 이제는 살고자 했다.

그때의 나는 내게 일어난 모든 불행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원망과 증오의 칼끝은 대상을 찾지 못해서 내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 예민하고 우울한 내가 살아가기에 세상은 포식자들과 함께 가둬진 어항 같았다. 무섭고 두려워서 피하는 곳마다 투명한 벽에 이마를 부딪쳤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늘 사랑 같은 것을 쥐고도 그것이 상하고 썩어버릴까 하고 먼저 내다 버리는 사람이었다. 폭우 속에서 잠시나마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삶에 안심이 들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멎고 하늘이 저쪽부터 보랏빛으로 밝아오고 있을 때였다. 그대로 걸어서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가뭇했다. 며칠을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자 현실감각을 찾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척거리며 나간 부엌에는 한 솥 가득 국이 끓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휴대전화. 지갑. 다행히 있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다행히 없었다.

올해도 큰 장마가 왔다. 비는 때로 현상이나 조건이 아닌 하나의 공간이 된다. 비가 내릴 때, 세상은 거대한 물기로 둘러싸인 공간이 된다. 몸에 열도 많고 땀도 많아서 여름과 맞지 않는 신체를 가진 나는 삶의 거의 모든 여름과 불화했다. 생각의 비약일지는 모르겠으나, 인생의 불행한 사건들도 거의 여름이라는 계절 속에서 벌어졌다. 여름에 내리는 비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물로 만든 창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가 올 때 나는 모든 외출을 취소하는 편이다. 세상의 습도가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고 감추고 싶은 마음을 드러나게 한다. 그래서 장마는 여러모로 위험한 경험이다. 특히 우울을 기질로 가진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식량과 베개 여덟개, 책 세권과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있다면 한 달 정도는 우습게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수 있는 순정 ‘집돌이’인 내게 요즘은 상대적으로 눈치가 덜 보이는 때다. 코로나 시대의 자가격리를 나는 일찍이 실천해온 셈이니까. 첫 시집을 내고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시인이라는 퍽퍽한 사정을 아는 친구들과 후배들과 선배들은 나의 퇴사를 말리면서 응원하고 질투하고 구박했다. 원래 계획하던 일이었는데 코로나가 변수였다. 나는 졸지에 코로나 시대에 퇴사를 감행하며 영화 <매드맥스>에서 폭주하는 주인공 맥스인 양 취급받았다. 뚜렷하게 밝힐 수 있는 퇴사 이유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또 결정적인 이유는 아닌 거 같아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아무튼, 여러 이유로 나는 올해 여름, 거의 집에만 있다. 그러나 이 장마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누군가 있다면 늦게라도 돌아오라, 말하고 싶다. 가끔은 완전히 망가져도 좋으니 어떻게든 무사 귀환하라. 이 집은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결정적인 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은 당신이 한다. 장마는 끝이 날 것이다.

최현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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