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로망스 손가락 소설 - 8월의 작가 강화길

등록 2020-08-14 13:30수정 2020-08-14 13:34

내 연애사의 최고 조언자 할머니
너무 생생해서 할머니 경험담
치매가 찾아온 할머니, 그래서 방 치우는데….
그 방에서 발견한 5권의 책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타인에게도 긴 여운
일러스트 백승영.
일러스트 백승영.

1.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말했어. “그러지 마라.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그럴 가치가 없는 일이다.” 순간 나는 울음이 터졌어. 나도 알아. 별말 아닌 거.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했겠어? 머리로는 다 알지. 모를 리가 있나.

참 이상해. 상대가 나를 안 좋아한다 싶으면 마음을 접으면 되잖아. 그런데 나는 어떻게든 그 마음을 바꿔놓고 싶어 했어. 오기가 났던 거지. 어떻게든 나를 좋아하게 만들겠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만들겠다. 근데 말이야. 그걸로 이미 관계는 끝난 거야. 그게 무슨 연애고, 사랑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했지. 그때 걔를 만나면 그런 생각만 했어. 나를 시험하고 있다. 평가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트집이 잡히면 안 된다. 걔가 원하는 걸 생각하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배고프다고 하면 밥을 해먹이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하품을 하면 채널을 바꿔줬지. 그때 할머니가 그랬던 거야. “그럴 가치가 없는 일이다.”

한바탕 울고 나니 정신이 들었어. 그때가 몇 살이었더라. 스물한살쯤 되었던가? 이후 나는 할머니에게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시시콜콜 다 털어놓았어. 몇 명은 할머니에게 직접 보여주기도 했지. 할머니의 조언은 대체로 정확했어. 그런 기분 알아? 어떤 질투나 미움이 느껴지지 않는, 오직 내 인생만을 위한 조언을 듣는 기분. 완벽한 내 편이 있는 그런 느낌말이야.

박화자 여사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나는 할머니의 조언보다는 다른 걸 더 좋아했어. 그러니까, “그놈은 소심해서 절대 네게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못할 거다. 네가 결단을 내려야 해.” 아니면,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둘이 같이 있을 때, 네 마음이 어떤지를 잘 생각하렴.” 이런 거 말고.

그래. 이런 거.

“그 사람이 날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었지. 하지만 나는 끝까지 모른 척했어.”

할머니는 말할 때, 예를 많이 드는 사람이었거든. 그중에서도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타입. ‘나는 이랬는데, 너는 어떠니? 저러는 게 좋지 않겠니?'라고 말하는 사람 말이야. 진짜 신기했어. 시대도 다르고, 세대도 달라서 그녀의 경험이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할머니에게 당신은 이런 적이 없냐고, 당신의 이야기 좀 해달라고 조르고 있었어. 처음 좋아했던 사람, 엇갈렸던 사람,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원했던 사람, 사랑하는 마음보다 미움이 커서 오히려 헤어질 수 없었던 사람, 날 선 말을 잔뜩 집어 던진 걸 평생 후회한 사람, 과연 그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을 줬던 사람,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줬던 사람. 나는 은근슬쩍 물어보곤 했어.

“그럼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

할머니는 못 들은 척하다가 말을 돌리곤 했지. 하지만 입가에는 언제나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어. 뭐랄까, 조금만 더 캐물으면 대답을 해줄 것 같은 분위기였달까. 나는 매번 넘어갔고, 온갖 질문을 다 해댔지. 하지만 할머니는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할 뿐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나만 늘 안달이 나 있었어. 약이 올라서 이러쿵저러쿵 떠들면 할머니는 박장대소를 하며 엄지로 내 이마를 문지르곤 했어. 지금도 종종 느껴져. 얼굴 어딘가를 어루만지던 할머니의 그 손길이 말이야. 부드럽고 다정한….

그런데, 당신은 지금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라는 거야?

2.

나는 ‘어쩌면’ 이라는 말을 꺼냈을 뿐이다. 모두 다 그 책들 때문이었다.

아내의 할머니는 안진 동산동에 있는 10평짜리 원룸에서 혼자 오래 살았다. 그녀는 매우 부지런하고 깔끔했다. 집을 매일 쓸고 닦는 것은 물론, 수시로 쓰레기를 버리고 물건을 정리했다. 매우 정갈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녀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하고 차를 한잔 마셨다. 과일과 떡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집안일을 하고, 성당과 복지회관에 가서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봉사활동을 했다. 저녁 즈음 집에 돌아오면서 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샀다. 그녀는 비싼 재료는 절대 사지 않았다. 그날그날 적당한 가격에 나온 제철 채소와 생선, 살코기를 조금씩 살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반찬은 나물이나 조림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반시간 정도 산책을 했고, 돌아와 씻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종종 할머니가 일본인 같다고 느꼈다. 뜬금없지만 그랬다. 처음 그 말을 했을 때 아내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라고 중얼거렸다. 실제로 할머니는 일본 색채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나 물건에 익숙했고, 뭐랄까, 그래, 그런 것들을 선호했다. 식민지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취향이었을까. 아내와 함께 할머니를 방문한 날이면, 나는 채소 절임과 단 과자, 가쓰오부시로 낸 국물 요리,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일본 단어들을 끊임없이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유난스러운’ 반응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일본어 전공자였고, 교환학생으로 도쿄에서 2년간 생활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에 익숙했고, 언제 어디서든 그 나라의 느낌을 쉽게 찾아내곤 했다.

일년 전, 아내의 할머니는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았다. 병의 진행이 빠르다고 했다. 할머니는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에서, 봉사를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할머니는…. 의연했다. 모르겠다. 이건 나의 느낌일 뿐이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분명한 건, 아내는 힘들어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자신의 할머니가 계절과 시간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몸에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을, 그것이 왜 이상한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내는 매사에 의욕을 잃었고, 허무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한 날, 아내는 많이 울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 말만 반복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아내의 마음을 더 살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일요일, 우리는 동산동의 원룸을 정리했다. 단정하고 말끔한, 삶의 흔적들을 천천히 지워나갔다. 예상대로 할머니는 짐이 많지 않았다. 버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가구들을 정리하고 나자 집은 정말로 텅 비었다. 마지막 점검을 할 요량으로 집안 여기저기를 열어보며 확인하던 중, 찬장 구석에 신문지 더미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왜 이걸 몰랐지?

무심코 손을 뻗은 나는 잠시 놀랐다. 그건 책더미였다. 일본어로 쓰인, 다섯 권의 문고판 책들. 나는 그 책들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어쩐지 할머니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듯한, 은밀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로맨스 소설들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할머니에게 이런 취미가 있었구나. 별생각 없이 책을 집어 들던 나는 순간 멈칫, 그 자리에 섰다. 다시 한 번 책을 들춰보았다. 책을 읽었다. 역시 로맨스 소설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 엇갈린 마음들.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원하는 사람의 이야기. 사랑하는 마음보다 미움이 커서 오히려 헤어지지 못하는 이야기. 날 선 말을 잔뜩 내던진 뒤 계속 후회하는 이야기. 과연 다시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상대를 사랑하는 이야기.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

그동안 할머니가 아내에게 해준 이야기들이었다.

3.

그러니까, 다 거짓말이라는 뜻이잖아. 할머니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거잖아!

4.

박화자 여사는 나의 엄마와 같은 방을 썼다. 그러니까, 엄마의 요양원 병실 룸메이트였다는 뜻이다. 처음 봤을 때는 병환이 그렇게 깊은지 몰랐다. 그녀는 매우 깔끔하고 단정했다. 별다른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엄마의 치매는 경미한 편이었지만, 우울증을 함께 앓았다. 이 때문에 겉으로 보면 박화자 여사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 보였던 것이다. 엄마는 드라마를 볼 때나 가끔 웃었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드라마를 잔뜩 다운로드 받은 외장 하드를 들고 요양원에 가곤 했다.

엄마가 드라마를 보며 웃기만 했다면, 박화자 여사는 말을 많이 했다. 그녀는 어깨너머로 엄마의 드라마를 슬며시 훔쳐보며 주인공들의 연애사에 이런저런 훈수를 두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게 꽤 재밌었다. 치매를 앓는 노인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고,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다. 가끔은 그녀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자신의 전성기 시절을 회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달까.

이후 나는 박화자 여사의 손녀 부부를 통해, 그녀가 일본 로맨스 소설 애독자였고 그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인 듯 말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짓궂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머감각이 대단하시네요.”

손녀는 나를 따라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게요. 이렇게 웃고 지나갈 일인데. 뭐가 그렇게 심각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손녀 부부와도 가까워졌고, 그들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손녀의 남편은 일본어 전공자로 해운회사 직원이었고, 손녀는 구두 디자이너였다. 내가 일본 소설 번역가라는 걸 알자 그들은 매우 반가워했다. “인연이네요.” 손녀가 이렇게 말했다. 이어 나는 박화자 여사의 ‘왜색 취향’에 대해 들었고, 그 일본 로맨스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손녀는 박화자 여사에게 직접 들었고, 그 남편은 책으로 직접 읽었던, 그 많은 사랑에 대해서.

꽤 재미있었다. 나는 그 소설들의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더니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하나코(花子)에요.”

나는 이게 무슨 농담인가 싶어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진지했다. 다만 그들이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조사해본 결과, ‘하나코’라는 이름은 필명에 불과했다. 작품은 그 다섯권이 전부였다. 그마저 오래전 절판되었기 때문에 시중에서는 더 이상 그 책들을 찾을 수 없었다.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코의 사진도 인터뷰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하나코’는 오직 이름과 작품으로만 존재했다.

어어?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머릿속에서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손녀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저희 할머니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세요. 단어 몇 개만 아실 뿐이에요.”

“정말요?”

“네. 정말이에요. 분명해요.”

모르겠다. 왜였을까. 그 대답은 내 마음에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서운함, 속상함, 실망감, 아니, 어떤 기대와 희망, 설렘.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명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도무지 떨어져 나가지 않는 미련 때문에 끝내 붙들게 되는 어떤 마음.

나는 박화자 여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그래, 아주 조금만 기다린다면, 그녀가 내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슬며시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어느 날, 할머니가 말했다.

강화길(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숲 여행도 하고 족욕도 하고…당일치기 기차 여행 1.

숲 여행도 하고 족욕도 하고…당일치기 기차 여행

[ESC] 오늘도 냠냠냠: 16화 화곡동 전주뼈해장국 2.

[ESC] 오늘도 냠냠냠: 16화 화곡동 전주뼈해장국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3.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ESC] “인간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숭고한 건 농담” 4.

[ESC] “인간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숭고한 건 농담”

[국회! OX 퀴즈] 아무나 들어갈 수 있수? 5.

[국회! OX 퀴즈] 아무나 들어갈 수 있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