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생일 전야

등록 2021-04-15 04:59수정 2021-04-15 09:16

8살 피터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밤
척과 메리는 풍선으로 집을 장식하며
동료 빌리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데…
일러스트 백승영
일러스트 백승영

자기도 빌리 알지?

그날 밤 척 와이즈먼은 아들 피터가 2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잠든 것이 확실해진 순간부터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풍선의 종류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과 어떤 종류의 풍선이든 거실 소파에 앉아서 풍선을 한 시간 동안 분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꾼 지 일주일밖에 안 된 티브이에서는 슈퍼볼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메리를 설득한 끝에 구입한 물건이었고 매장 점원이 말한 대로 놀랄 만큼 화질이 좋았다. 쿼터백이 자기 팀 선수들을 향해 소리를 지를 때마다 씹는 담배가 치아 건강에 얼마나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 것은 쿼터백과 같이 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들도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쿼터백의 단골 치과의사가 된 듯한 현장감도 풍선을 부는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기야, 티브이 소리 좀 줄여. 피터가 깨면 어쩌려고 그래.

메리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녀도 1시간째 풍선을 불고 있었다. 척은 30분 전부터 아내가 이렇게 많은 풍선을 모두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궁금했다. 물론 척도 8살짜리 아들의 생일파티에 많은 풍선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척이 보기에 메리는 풍선으로 집안을 가득 채우려는 것 같았고 그래야 다음 날 아침 자신의 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한 피터가 깜짝 놀라며 행복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쩌면 피터는 자기 생각과 달리 풍선에 관심이 없을지도 몰라.

계속 바람을 불었더니 입안이 마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척은 허리를 펴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나며 며칠 전에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가 얼마나 시원할지 생각했다. 냉장고는 싱크대 옆에 있었고 그는 식탁을 지나치면서 고집스럽게 풍선을 불고 있는 메리의 어깨를 가볍게 한번 쥐었다 놓았다.

모든 자식들이 부모의 생각과 다르기는 하지. 나도 그랬고. 하지만 자기도 피터가 토미의 생일파티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봤다면 그런 말은 못 할걸. 자기도 토미네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잖아. 다섯 시간 동안 풍선만 불었대.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토미 엄마 말로는 그래. 맥주 마실 거면 내 것도 하나 꺼내줘.

맥주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병에 손을 대는 순간 척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버드와이저 두 병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세 개의 식탁 의자 중 비어있는 한 곳에 앉아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인 것처럼 메리가 불어놓은 풍선들을 바라보며 느리게 말했다.

며칠 전에 빌리가 죽었어.

세상에, 정말이야?

자기 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대. 빌리는 아주 높은 아파트에 살았거든. 자동차 지붕 위로 떨어졌는데. 찰리 말로는… 찰리? 괜찮은 친구야. 복지정책과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자기하고도 잘 맞을 거야. 언제 한번 집에 놀러 오라고 할게. 아무튼 찰리가 그러는데 사람이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바닥에 닿기 전에 기절하게 된대. 빌리도 틀림없이 그랬을 거래. 나도 그랬기를 바라.

척은 말을 마친 다음 맥주를 마시며 아내의 반응을 살폈다. 메리는 손가락으로 차가운 맥주병을 만지작거리며 거실 벽에 난 흠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척의 말에 아무런 영향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는 속도가 평소보다 좀 빠른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방금 척이 한 말 때문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TV에서는 아직 슈퍼볼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고, 음량을 줄이기는 했지만 부엌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 척은 고개를 돌려 메리가 바라보고 있는 거실 벽의 흠집을 바라보았다. 못을 박았다가 빼낸 자국 같았다. 아니면 못을 박다가 포기한 자국일 수도 있었다. 척은 그곳에 못을 박은 기억이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누군가 그곳에 못을 박은 적이 있었고 메리와 척이 그 흠집을 보았고 이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빈 맥주병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기야, 맥주 한 병 더할래? 난 한 병 더할 건데.

그러지 뭐. 고마워, 자기.

척은 식탁 의자에 올라서서 거실 천장에 풍선을 붙이고 있었다. 풍선은 전부 다 하트 모양의 색종이 조각이 가득 들어있는 컨페티풍선이었는데 흔들릴 때마다 먼 곳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났고 생일파티가 끝나기 전에 모두 터져서 거실 바닥을 쓰레기장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메리는 풍선에 양면테이프를 붙였고 척이 손을 내밀 때마다 그것들을 주의 깊게 하나씩 건넸다. 그녀는 남편이 풍선을 제대로 붙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끔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올려 보다가 불현듯 할 말이 생각난 사람처럼 말했다.

그래, 생각나. 모임에서 한번 봤었잖아. 네바다주에 간 코끼리에 대해서 농담을 했던 것 같은데 난 그게 농담인지 잘 모르겠더라.

누가 그랬다는 거야?

빌리 발렌타인 씨 말이야.

아, 빌리가 가끔 그러기는 했지. 자기 말이 맞아. 나도 빌리의 농담은 농담인지 모르겠더라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식탁 의자가 약간씩 삐걱댔다. 심하게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두면 곧 심하게 흔들릴 것 같았다. 척은 내일 당장 식탁 의자 세 개를 모두 손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붙인 풍선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살폈다. 나빠 보이지 않았다. 메리와 피터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가 볼 때는 그랬다.

하긴 코끼리가 네바다주에 가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척이 볼 때 빌리는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컵 밑바닥처럼 두꺼운 뿔테안경을 썼고,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다녔고, 식탁에 있는 음식을 알파벳 순으로 먹었고, 누가 말할 때는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는 말을 하루에 세 번 이상 했고, 그게 뭐든 낭비되는 것을 참지 못했고, 자기가 발가락 양말을 신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물론 그런 사람들이 모두 빌리처럼 꽉 막혔다는 것은 아니지만 척이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빌리가 가장 꽉 막힌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한 달쯤 전부터 빌리가 빌리 같지 않기는 했어.

발렌타인 씨가 원래 어땠는데?

빌리가 원래 어땠는지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아주 길어져, 자기야.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그냥 빌리가 빌리 같지 않았다는 거야.

음, 뭔지 알 것 같아. 난 자기의 요점이 마음에 들어. 계속해봐, 자기야.

거실 천장의 반이 풍선에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은 그렇지 못했다. 척이 풍선으로 완전히 뒤덮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지만 그래 보였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래 보인다는 것이 본질에 더 가까웠다. 척은 식탁 의자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한번 켠 뒤 방금 내려온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까보다 더 많이 삐걱대는 것 같았고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 확실했다. 척은 바닥에 깔린 카펫을 바라보며 빌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 날 찰리가 요즘 빌리가 좀 이상해 보이는데 내 생각은 어떤지 묻더라고. 자기도 알겠지만 갑자기 뭘 물어보면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하잖아. 아무튼 그때 찰리한테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어. 찰리는 그러냐며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는 가버리더라. 그런데 찰리가 가고 난 뒤에 생각해보니 빌리가 정말 이상해진 것 같긴 했어. 빌리가 빌리 같지 않았지.

어땠는데?

메리는 거실 바닥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서 척을 올려다봤고 그때 척은 메리가 자기 아내이기 때문에 그동안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메리는 사랑스러웠다. 균형 잡힌 몸과 탄력 있는 피부와 반듯한 이마와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와 귀를 살짝 덮고 있는 검은 단발머리와… 언젠가 메리가 그런 것들을 모두 잃어버린다 해도 메리는 여전히 사랑스러울 것 같았다.

아, 그게 말이야. 음, 그러니까….

빌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예전과 달라 보였다. 그는 여전히 컵 밑바닥처럼 두꺼운 뿔테안경을 썼고, 와이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다녔고 나무판자처럼 딱딱해 보인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척이 아는 빌리와는 아주 조금 달랐고 그건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이었다. 무대 위에서 빌리와 똑같이 생긴 배우가 빌리의 옷을 입고 빌리처럼 행동하며 빌리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빌리가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을 때도 그래. 예전에 빌리는 그렇게 서 있지 않았거든.

예전에 발렌타인 씨는 어떻게 서 있었는데?

예전에 빌리는… 아무튼 절대 그렇게 서 있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해.

빌리는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본다거나 멍한 표정으로 복사기 앞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쯤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볼 수는 있지만 그렇게 오래, 그렇게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척은 예전의 빌리라면 복사기 근처에 창문이 있는지도 몰랐으리라는 데에 약간의 돈을 걸 의향까지 있었다.

발렌타인 씨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 도움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자기 말이 맞아. 도움을 줄 수도 있었겠지. 빌리가 도움을 원했다면 말이야.

척은 어디에서 빌리를 만나 그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했다. 벽에 걸려있는 보안관 모자 때문에 박물관으로 통하는 직원휴게실일 수도 있었고 몇 년에 걸쳐서 척의 동전을 꾸준히 백 달러쯤 꿀꺽한 복도 자판기 앞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두 곳 다 아닐 수도 있었는데 두 곳 다 아닐 가능성이 가장 컸다.

아무튼 빌리가 그러는 건 처음 봤어. 마지막이기도 했지만.

빌리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척이 요즘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자 빌리는 자기가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보이느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말한 다음 그냥 지나쳐갔다면 척도 똑같이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빌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바지 위에 손바닥을 문질러대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으면 바지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러 댈 것 같았다. 그때 척은 빌리가 자기 눈을 피한다고 생각했고 곧 그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깨달았다.

빌리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어. 갑자기 생각이 바뀐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은 확실해.

그 후에도 빌리를 몇 번 봤지만 그때처럼 바지에 손바닥을 문지르거나 눈을 피하거나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빌리가 그랬던 것은 그때 한 번뿐이었고 척은 누구에게나 그래 보이는 때가 한번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척은 빌리가 자동차 지붕 위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그때를 떠올렸고 요즘도 그러려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때가 떠올랐다.

정말이야?

정말이야.

척은 지금이 새벽 두 시쯤일 거라고 생각했고 벽시계를 보며 자기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메리는 거실에서 피터의 생일선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척이 할 일은 메리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시킬 일 있으면 말해.

그럴게.

척은 자기가 준비한 선물상자가 가장 클 거라고 생각했지만 멕시코에서 호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장인이 더 큰 선물상자를 보내서 패배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장인은 한창 때 유능한 사업가였고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와 어떻게 하면 적을 확실하게 쓰러트릴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시애틀에 사는 척의 여동생은 매년 크기와 모양이 조금씩 다른 민속 인형을 보냈는데 척이 민속 인형은 남자애의 생일선물로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충고했지만 몇 년째 오빠의 충고를 깨끗하게 무시한 채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척은 에밀리가 이번에도 자기가 해오던 방식을 고집해서 조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빌리 말이야.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척은 갑자기 그 말을 했고 그런 뒤에 메리를 보며 자기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정말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기는 했다. 메리는 고개를 들어 척을 바라보고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바라본 다음 다시 척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자기야. 내일은 피터의 생일이잖아.

척과 메리가 있는 거실은 조용했다. 그것은 아무도 없는 곳이 조용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더 적막했고 더 많은 것을 내포했고… 척과 메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그런 것들이 지나쳐가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강태식(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고립의 대명사 섬이 건넨 ‘여행의 쓸모’…목포서 쾌속선 2시간 [ESC] 1.

고립의 대명사 섬이 건넨 ‘여행의 쓸모’…목포서 쾌속선 2시간 [ESC]

‘당의정’ 같은 웃음의 힘 [ESC] 2.

‘당의정’ 같은 웃음의 힘 [ESC]

[ESC] 오늘도 냠냠냠: 1화 연남동 감나무집 기사식당 3.

[ESC] 오늘도 냠냠냠: 1화 연남동 감나무집 기사식당

오늘도 냠냠냠: 47화 필동 필동면옥 [ESC] 4.

오늘도 냠냠냠: 47화 필동 필동면옥 [ESC]

[ESC] 오늘도 냠냠냠: 16화 화곡동 전주뼈해장국 5.

[ESC] 오늘도 냠냠냠: 16화 화곡동 전주뼈해장국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