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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X–이경과 현호의 이야기

등록 2021-03-19 05:00수정 2021-03-19 09:42

지구에 접근하는 소행성 X
지구 파괴가 예측되어 불안한 지구인들
이경은 옛 연인 현호를 찾아 나서는데…
일러스트 백승영
일러스트 백승영

D-26

출근 기록기에 직원 카드로 체크를 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공용 테이블에 쌓여 있는 영화제 초청장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D-26일이고 영화제는 29일 후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날이 온다면, 영화제는 자연스럽게 무산되는 것이다.

사라질 테니까.

영화제가 예정된 서울극장, 서울극장 주변의 상가들과 오가는 사람들, 차량들, 건물과 조형물 모두. 모든 것이, 종로와 서울과 한국, 그리고 이경이 발을 디뎌본 적조차 없는 대륙과 섬들이 무너지고 휩쓸리고 불에 타는 장면 속에 있을 것이다. 유튜브에는 그날을 예측하는 동영상이 하루에도 수백개씩 업로드되는 중이었다.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한 잔 마시는 동안 다른 직원들도 하나둘 출근을 시작했다. 언뜻 보면 평소와 다를 것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같이 어리둥절함이 깃든 얼굴로 그들은 나타났다. 일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D-26일에. 그런 의문은 흙덩어리처럼 대충 뭉쳐 있다가 출근을 하기 위해 단잠에서 깨고 번잡한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사무실의 배정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동안 구체적인 불안감으로, 혹은 맹렬한 허무로 조각되는 것이다. X가 모든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날부터 사람들은 그렇게 닮아가기 시작했다고 이경은 느꼈다. 그러니까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터질지 불발에 그칠지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얼굴들로.

오늘도 무단 결근자는 있었다. 열두명의 직원 중 여섯 번째 무단 결근자는 여름에 채용된 신입이었다. 에너지 넘치던 유쾌한 모습으로 일을 하던 그를 다들 기억할 텐데도 그의 부재를 언급하는 직원은 없었다. 이경은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그런 날을 상상해봤다. 어느 날 사무실 문을 연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다. 텅 빈 책상들, 울리지 않는 전화, 전원이 꺼진 프린터와 복사기, 캄캄한 복도와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 어쩌면 바로 내일의 풍경이 될지도 몰랐다.

X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그 날이 떠올랐다. 태양계 밖 거대 행성이 수천만년 만에 태양계로 근접하면서 일부 소행성들의 궤도가 헝클어졌는데 그중 X의 궤도가 위험하다는 속보가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타전된 날이었다. 그때 이경은 속도와 무게를 표현하는 단위와 숫자들, 그리고 그 의미도 알 수 없는 전문 용어로 X를 설명하는 속보 화면 속 외국인 우주과학자를 지구의 모든 거주인들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었다. 윤수씨와 예식장을 예약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는데, 식사 코스를 정하는 과정에서 다툰 탓에 차 안은 적막했고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운전 중이던 윤수씨는 이경의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속보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나중에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들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이후 항공우주국에서 시뮬레이션을 실행해본 결과 다섯번에 한 번은 X와 지구가 충돌하는 결과가 나왔다는 뉴스, 그러나 X에 흡수되는 태양 에너지의 양에 따라 X의 궤도는 언제라도 다시 변경될 수 있고 지구 또한 초당 30㎞씩 질주하는 행성이니 현재로써는 충돌 확률을 계산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충돌이 일어난다면 지구가 어떻게 변하고 인류는 얼마나 생존할지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X, 모든 것이 치명적으로 불확실한 X, X는 그래서 X였다.

오전 11시, 이경은 초청장을 보낼 단체와 배우의 목록을 검토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각자의 일에 열중해 있는 직원들을 둘러보았고, 그러다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재킷과 가방을 챙겼다. 이경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사무실에서 걸어 나올 때 이경에게 어디에 가느냐고 묻는 직원은 없었다. 오히려 완고하게 저마다의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다들 이경 쪽을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거리로 나오자 옷깃과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어제보다 한결 차가워진 바람은 지구가 X와 상관없이 여전히 정해진 궤도대로 성실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환기시켰다. 이경은 큰길을 따라 계속 걷다가 노선을 모르는 버스에 충동적으로 몸을 실었다.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저녁이 올 때까지 허기도 잊은 채 연달아 버스를 탔고 아무 데서나 내려 한참을 걷기도 했다. 목적지가 없는 작은 여행이라고 여겼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가려는 곳이 점점 뚜렷해졌다.

어느새 현호가 살던 빌라 앞에 발길이 닿아 있었다.

현호와는 영화과 동기로 만났다. 대학에 다니면서,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로 성장하여 함께 영화를 만드는 미래를 그리며 연인으로 지냈다. 서른살이 되던 해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헤어진 뒤 이경은 인권영화제를 주최하는 재단에 취업했고, 출퇴근을 하고 전화를 받고 회의에 들어가는 생활로 삶을 채워갔다. 윤수씨와는 올해 초에 소개로 만났는데, 이 시기가 지나면 이번 생은 결혼과 무관하리란 걸 막연하게 예감하던 때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 액정에는 윤수씨의 이름이 떠 있었다. 결혼 날짜는 43일 후였다. 26에서 다시 17을 더해야 가닿는 날짜, 이경에게는 그날이 죽음 너머의 세계처럼 현실감 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윤수씨는 그럴까, 이경은 구두 앞코로 길바닥에 쌓인 낙엽을 솎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생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26일을 진심으로 나와 보내고 싶은 걸까. 이경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휴대전화 액정에서 ‘심윤수’가 사라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벨 소리가 멈추자,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면서 서운함과 미안함이 같은 무게로 밀려왔다. 괴롭긴 했지만 미련이나 죄책감보다는 옅은 농도의 감정이었다. 윤수씨는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방금 불이 켜진 403호 거실 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돌아서려는데 이경아, 부르던 현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현호와 헤어진 이후로는 이경씨, 전이경님, 전 대리, 선배님으로만 불려왔다는 것이 새롭게 상기됐고 그제야 이경은 자신이 이곳까지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지 옛 연인이 아니라 꿈과 사랑, 신념이 있었던, 그러니까 생활 이상의 삶이 가능했던 시절을 찾아온 것임을. 이경은 이대로 아무런 시도 없이 돌아설까 봐 겁이 난다는 듯 한걸음에 계단을 올라 단박에 403호 초인종을 눌렀다.

놀랍게도, 문 저편에서 곧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D-17

현호는 냉동고에서 작업대로 옮긴 시신 앞에서 5초간 묵례했다. 82살, 남자, 심장마비. 언제나처럼 서류에 적힌 내용을 떠올리며 명복을 빌었고, 묵례 뒤엔 알코올이 섞인 물을 거즈에 적셔 위생장갑을 낀 손으로 발부터 닦기 시작했다. 발에서 머리 순으로 닦는 것을 마무리하면 얼굴과 머리칼을 정돈할 것이고 어깨와 허리, 발목 등을 끈으로 묶어 고정한 뒤 한지를 덧대 수의를 입힐 것이다. 2인 1조로 함께 일해오던 동료가 연락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은 탓에 평소보다는 한두 시간 더 소요되긴 할 터였다.

묵묵히 염습을 진행하던 현호는 문득 멈춰선 채, 연한 노란색과 갈색 사이의 오묘한 빛깔이 침윤된 고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세상 사람들보다 17일 먼저 죽음을 맞은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하긴, 남들보다 17일을 덜 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죽음은 영원하고, 영원의 관점에서는 17일이란 찰나조차 될 수 없을 테니. 노인이 누린 행운이 있다면 고유한 죽음의 기회라고 현호는 생각했다. 17일 이후 X가 정말로 지구와 충돌한다면 짐작도 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러니까 장례랄지 애도의 절차 없이 익명의 죽음을 맞게 될 테니까.

정오 무렵 염습은 끝났다. 유가족이 동석하는 입관 절차를 치르기 전까지 여유가 있었으므로 현호는 일단 안치실에서 나왔다. 이경 생각이 났다. 영화를 포기하고 뜻밖에도 장례지도사가 되어 살고 있는 자신에게 7년 만에 돌아온 이경…. 그녀는 20일째 현호의 집에 머무는 중이었는데, 그동안 출근한 적은 없었고 그저 걱정이 될 만큼 오래오래 잠을 잤다. 씻고 먹는 활동에 소홀했고 새벽이나 해 질 녘 때면 한 번씩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곤 했다.

일어났으면 밥 챙겨 먹어. 굶지 말고.

복도를 걸으며 이경에게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 휴대전화 화면에 알람 표시가 떴다. 클릭해서 보니, X와 지구가 20%의 확률로 충돌한다는 공식발표는 사회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거짓이며 실제 시뮬레이션 결과는 훨씬 더 절망적이라는 소문을 적은 맞팔의 트윗이었다.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이어서 현호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X는 그동안 영화나 책에서 본 우주 지식과 우주 기술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과학자들은 X가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출현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 무인 우주선에 원자폭탄을 실어 X를 폭파시킨다는 프로젝트는 계획 단계에서 무산됐다. 빠르게 움직이는 X에 적중할 우주선 제작은 현재 인류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며 설혹 기술을 보유했다 해도 D-day까지는 설계도조차 완성할 수 없다고 했다. 인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확률을 맹신하며 낙천적으로 일상을 유지하거나 진료실 밖에서 대기하는 환자처럼 불안증에 잠식되는 것, 혹은 신을 절망적으로 의심하면서도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그게 다였다.

현호는 곧 병원에서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걷고 싶어서 시작한 산책이었는데, 무심한 마음으로 걷다 보니 이대로 끝나지 않을 산책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역 근처 번화가를 지나갈 땐 X의 사진을 속보로 전하는 옥외 멀티비전이 눈에 들어왔다. 지구와 금성 사이를 운항 중이던 무인 우주선이 보내온 것으로 현재까지는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X를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사진 속 X는 작은 호두처럼 보일 뿐, 별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현호의 눈에는 X보다는 속보를 전하는 앵커와 기자의 얼굴이 부각되어 보였고, 화면 바깥에서 일하고 있을 카메라와 조명 스태프들, 피디와 작가, 의상과 헤어와 메이크업 담당자, 전파 관리자들이 구체적으로 상상이 됐다. 그들의 시간이 노동으로 소모되고 있는 현실이 문득 서글퍼졌다. 고작 이렇게 망할 세상이었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태어나 살아왔던가. 상처받고 상처 주며 일하고 사랑한 시간은 다 뭐란 말인가. 이 상황을 납득시켜준다면 어느 비열한 인간이라도 맹신하며 그의 추종자가 될 수도 있겠다고 현호는 생각했다.

횡단보도 앞으로 걸어간 현호는 신호등이 수십번에 걸쳐 바뀌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D-1

곧 자정이었다.

이경은 현호 옆에 누웠다. 몸살에 걸린 현호는 벽을 향해 활처럼 몸을 말고는 잔기침을 했다. 밖에서는 어제처럼, 어제의 어제처럼 고함과 노랫소리, 폭주하는 자동차 소리, 유리나 플라스틱이 깨지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며칠 새 밤의 거리를 채우고 있는 소음이었다. 그 익숙한 소음 사이로 묵직한 굉음이 파고들었을 때, 이경과 현호는 동시에 서로를 끌어안았고 맞댄 몸에서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을 느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이경은 젖은 얼굴로 현호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는 자신처럼 울고 있는 현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발된 폭죽이었나 봐. 이경의 말에 두 사람은 이내 조용히 웃었다. 잠시 뒤 이경은 시계를 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

아직 여덟 시간 25분이 남았다고, 그렇게 말했다.

조해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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