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의 기상학자 윌 스테펀은 지난해 말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 인류세 심포지엄’ 기조 강연 끝에 말했다. 아직 인류가 종말의 임계점을 넘지는 않았다고. 과학자니까, 거짓말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가 만든 세상은 너무 많은 임계점에 이미 도달한 것은 아닐까. 빠르고 조용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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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잡지에서 청탁받은 시들을 쓰기 위해 매일 새벽 끙끙대고, 멍이 들듯이 파래지는 아침을 보며 잠이 드는 팔월이었다. 앓는 형국이었다. 시인들은 대체로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직업군과 마찬가지로 습관과 성향에 따라서 버티고 사는 모습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나는 게으르고 느린 편에 속한다. 신중함이라고 둔갑시켜 말하고 싶지만, 그냥 본성이 게으르고 느린 게 맞다. 집중에 불이 붙기까지 예열 과정이 꽤 길고 지루한 편이니까. 밤에 길들어서 세상이 어두워져야 읽고 쓸 수 있는 나는 여느 때처럼 컴컴한 방에서 노트북과 단둘이 지냈다. 흔히 창작의 고통을 비유하는 많은 비유법 중에 투병의 모습에 빗대는 건 유치하지만 꽤 적확하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진짜 병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현실 속에서 나의 투병은 하찮고 안전했다. 심각한 현 상황을 생각하면 부끄러웠다. 부끄러울 때마다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나의 고통은 얼마나 작고 안온한가.
세상에 금이 갔다. 정확하게는 세상을 이루는 개인들의 일상이 모두 조금씩 부서졌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당연하게 해왔던 일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다. 코로나는 시대의 호칭이 되었고 도시의 사람들은 더욱 외롭고 사나워졌다. 절반이 훌쩍 지난 2020년을 복기하면 마치 고요한 집 안에서 불현듯 탄내가 진동하는 상황처럼 여겨진다. 부엌에서 밥이 탄 것인지, 아니면 옆집에서 불이 난 것인지. 안 좋은 징조들은 냄새처럼 가득하지만 어떤 불행도 아직 확실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환기를 시켜야 하는지, 아예 집 밖으로 대피를 해야 하는지. 그런 망설임과 우왕좌왕이 봄부터 여름까지 사람들의 눈빛을 불안하게 흔들고 있다.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싶어서 괜히 온라인 신문 기사들을 읽다가 뇌리에 강력하게 남은 단어. ‘임계연쇄반응’. 북극권과 시베리아의 해빙이 심상치 않고, 해수면 높이 상승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그린란드의 빙상 소실이 올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는 내용이었다. 질병과 기후위기가 함께 오는 이 세계는 너무나 디스토피아적이지 않은가. 이 추세로 진행된다면 북극권 바다의 얼음은 30년 안에 모조리 녹는다는 것. 아니, 30년 안에 지구와 인류에게 종말이 온다는 것. 이를 두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명한 기상학자가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임계연쇄반응 시대에 다가서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가 말한 임계연쇄반응이란 녹은 빙하에서 유출된 물이 다시 열을 머금고 해빙을 가속하고 이렇게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탄소 배출이 급증하고 배출된 탄소는 다시 영구동토층의 증발을 가속하며 지구 생태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순환이 다가온다는 내용이었다. 기상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인류가 저지른 죄의 탄성이 인간을 멸망의 방향으로 튕겨내려고 새총의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는 듯이 들렸다. 너희는 이미 늦었다. 이것이 비유도 은유도 없이 사실을 전달하는 과학의 말이라니. 얼마나 섬뜩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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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낸다는 친구의 밝은 음성은 잘 지내지 못한다는 듯이 들렸다. 타인의 불행은 가끔 눈치를 채도 알아채지 못한 척해야 할 때가 있다. 친구가 필요했던 건 아마 소소하고 시답잖은 대화의 나열이었을 것. 나는 친구의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물었다. 잠을 규칙적으로 자주니까 얼마나 편한지, 엄마를 발음하지 못해서 어마마마 하면서 부르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튼튼하게 불어나는 몸무게와 쌍꺼풀을 언제 만들어줘야 하는지를 말하는 친구와의 통화는 어쩐지 힘들었다. 아버님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암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입원 환자의 병간호를 한 사람만 간신히, 그것도 매번 코로나 감염검사를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랑 싸운 어머니가 병실을 뛰쳐나온 날이면 친구가 집에서 아이를 돌보다가 들어갔다. 아픈 사람이 가지는 변덕과 생존에 대한 조급함은 가족들을 지치게 했다. 친구는 지금까지의 인생 대부분을 아버지가 일으킨 가정의 불화를 감당하느라 마음이 많이 닳았다.
애정과 증오가 오래 공존했던 사람의 마음은 점차 얇아진다. 그래서 쉽게 찢어진다. 그랬던 친구가 자신의 가정을 만들면서 조금씩 두꺼워졌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영혼에 부드러운 근육이 생기는 걸까. 아이가 생긴다는 게 어떤 기분이야? 죽을 만큼 힘든데 죽을 만큼 행복해. 친구의 말이 마치 또 다른 애증이 생겼다는 듯이 들려서 속으로 웃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육아의 본질은 결국 또 한 번 마음을 최대로 늘이고 줄이는 훈련이겠구나. 웨이트트레이닝처럼. 통화의 마지막 인사는 늘 같았다. 코로나 지나면 보자.
친구는 아버지를 용서하는 중일까. 아니면 새롭게 미워하는 중일까. 그도 아니면 시간이 모래처럼 덮여 애정도 증오도 작은 모서리만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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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빙하는 녹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극점에 있다는 얼음의 세계는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곳이지만, 그곳이 존재하므로 생태가 돌아가고 인간의 영토가 안전해진다. 빙하가 녹는 이유가 인간의 잘못인지 지구의 운명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 원인 중에 인간의 잘못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허락을 초과하면서 살아왔다. 너무 많이 만들고, 너무 쉽게 버리고, 너무 크게 싸웠다. 인간은 참 바빴다. 멈추지 않고 바빴다.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은 싸울 준비를 한다. 이것은 동물이 가진 속성이다. 분노는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몸이 필요로하는 정서적 자세이기 때문이다. 몸에 더 많은 긴장을 발생시켜 적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맞서기 위해서는 슬픔이나 우울보다 분노나 공포가 지배하는 상태가 이롭다. 그래서 불안을 분노로 가공하는 건 동물이 살아가기 위한 본능에 가깝다.
그러나 분노와 공포는 전염이 된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분노한다는 건, 바로 주위에 위기 상황이 닥쳤다는 신호다. 확산되는 분노와 공포는 섬세함과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우리가 조금 더 살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자세하게 생각하고 정확하게 싸워야 할 텐데, 이제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애정과 증오의 모서리를 덮어줄 시간이 우리에게는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을을 지나 겨울에는 끝이 날까. 하얀 눈이 내리고, 그 눈이 이 모든 분위기를 차분하게 덮어줄 수 있을까. 다시 단순한 일상과 사소하고 다정한 생각을 하면서 생활을 채울 수 있다면. 이 문장을 적기 시작한 새벽에는 태풍이 왔다. 깨질 듯이 흔들리는 유리창. 이번 여름은 유독 손이 거칠다. 아침이 오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최현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