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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삶이라는 덩어리

등록 2020-10-09 10:06수정 2020-10-09 10:29

최근 조용히 외출 재개해 간 곳은 식물 가게
매장 넓히는 주인 만나 활짝 웃은 나
식물 집사에게 적절한 위로와 응원 돼
집에서 목격한 괴근식물의 퇴근, 삶이 보내는 첫 신호
최근 식물 키우기에 빠진 이들이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최근 식물 키우기에 빠진 이들이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식물을 인터넷보다는 현장에 가서 사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과 식물이 청량한 활기와 경탄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타인들과의 만남은 식물로 치자면 빗물 보약 같은 일, 중요한 자양분이자 물방울들의 기분 좋은 두드림처럼 에너지 가득한 자극이기도 하다.

팬데믹 이후 원래 작가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고 대체로 집에서 작업을 하니 영향이 좀 덜하지 않으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슬프게도 그렇지 않다. 세상이 위축되면 우리의 펜도 활기를 잃는다. 글이란 절대적인 시간이 주어진다고 기계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식물처럼 뻗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유행의 조짐이 있던 지난달 내내 나는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조심스럽게 외출을 재개했는데, 가장 먼저 간 곳도 대중교통을 여러 번 갈아타고 가야 하는 한 식물 가게였다. 문래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했는데 어느 정오 그렇게 정류장에 서 있다가 조해진 작가의 단편소설 <문래>를 떠올렸다. 2호선을 타고 지나만 다니던 그곳이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 건 그 소설 때문이었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들어간 그 아름다운 단편을 읽고 난 뒤 문래는 언제나 글쓰기(文)가 오는 동네(來)라는 말로 기억되었다. 어둑한 지하철 통로를 지나며 문래, 문래, 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마음이 설핏 아려오곤 했다. 아픈 유년에서 걸어 나온 한 사람이 자신의 과거 동네를 돌아보며 그럼에도 그곳이 글쓰기가, 소설이, 문학이 온 곳이라고 명명하는 순간의 벅참 같은 것. 상처를 이기고 온 사람이 지니는 선명한 긍지 속에서도 얼룩덜룩하게 번져 있을 슬픔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날도 가을은 완연했고 자전거는 지나갔고 공원에서는 이따금 사람들이 뛰었다. 문래의 삶이 계속되고 있었다.

식물 가게는 평범했다. 도로가를 면해 있었고 그냥 지나친다면 그곳이 희귀식물을 취급하는 매장이라는 생각을 못 할 것처럼 작았다. 나는 식물 가게를 갈 때면 늘 그러듯 일단 보도로 나와 있는 식물들을 살펴보았다. 아끼는 아이스크림 포장을 풀 듯 최대한 천천히 조금씩. 요즘 인기가 높은 괴근식물들이 볕을 쬐고 있었고 소코라코와 아카시아도 보였다. 그리고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매장 안에는 필로덴드론, 안스리움 같은 관엽식물들이 멋진 잎을 자랑하며 놓여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바로 그런 식물들의 잎 색 때문이었다. 식물을 기르다 보면 내가 식물의 어느 부분에 특히 반하는지를 깨닫는데, 내 경우에는 잎 색이었다. 녹색이 헤아릴 수 없이 다채롭다는 사실을 식물을 기르며 매번 실감한다. 때로 그 색으로 표현 못 할 감정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나는 1m가 넘는 뱅갈고무나무와 작은 토분에 심긴 멜라니고무나무를 기르는데, 뱅갈고무나무의 잎들은 형광빛이 날 정도의 상쾌한 연두색으로 명랑하고 멜라니고무나무의 잎은 짙은 올리브색으로 차분하고 정적이다. 멜라니고무나무의 색을 사물로 치자면 가죽으로 만든 필통이나 양장한 책의 표지쯤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라 멜라니고무나무의 잎 가장자리에는 선명한 아우트라인이 있어서 햇빛이 비치면 테두리만 노랗게 빛난다. 그냥 노랑이 아니라 노오~랑이라고 말을 길게 끌며 어떤 분위기를 더해야 할 만큼 입체적으로. 그러면 나는 햇빛이 가져온 그 극적 변화가 매혹적이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거의 눈을 떼지 못하고.

그렇게 입구를 구경하고 본격적으로 입장하려는데 매장문이 닫혀 있었다. 식물들을 밖에 내놓은 걸 보면 주인이 멀리 가지는 않은 듯하고 혹시 식사를 하러 갔을까, 아니면 오늘은 쉴 생각인가, 그러면 모처럼의 내 외출은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는데 옆 가게에서 주인이 톡 나오며 나를 반겼다. 가게를 옆으로 이전할 계획이라 셀프 공사를 하고 있다며 목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더니 다시 옆으로 건너가서 일하고 있는 가족을 도왔다. 매장에 혼자 남겨진 나는 날 어떻게 믿고? 하는 생각을 했다. 마스크 밖으로 보이는 내 인상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걸까. 아니면 혹시 매장 내 시시티브이가 있어서 도난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걸까.

결과적으로 그날 나는 몇 주간의 고립감을 떨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웃었다. 화원을 오가다 보면 말을 아끼는 주인들이 있고 자신 역시 지독한 ‘식물 덕후’여서 이 즐거움을 손님과 수다로 푸는 주인들도 있는데 그는 후자였다. 가게에 있는 꽤 많은 종류의 괴근식물들을 보여주며 주인은 그것이 왜 근사한가를 즐겁게 소개했다. 너무 예쁘지 않아요? 귀엽지 않나요? 하는 찬탄이 오갔다. 괴근식물은 덩어리 ‘괴’에 뿌리 ‘근’자를 쓰는 다육식물의 일종으로 몸통과 줄기와 뿌리가 하나다. 누군가는 생김새 때문에 감자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고 누군가는 인삼에도 비유하지만 사실 이름에 붙은 그 덩어리라는 말이 이 종의 모든 매력을 설명한다. 둔중한 무게감과 부피감 그리고 성장이 더디고 더뎌 정지된 듯한 상태가 마치 광물 같은 조형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괴근식물을 길러보지 않았지만 아주 튼튼하고 건강해 보고 있으면 힘을 얻는다는 주인의 찬탄에 한 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 주인은 괴근식물 중에는 타이의 험난한 벼랑 끝에서 온 종들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괴근의 육중한 몸체는 그런 혹독한 환경에서 버티기 위한 것이고 그러니 채취하려면 일꾼들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식물을 건네받으면서 나는 그 한 덩어리의 괴근이 불러들이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상념들에 휩싸였다. 누군가에게는 생계이자 상품이자 화물이자 진열품이지만 이제는 내게 와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빛을 쬐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살아내야 할 ‘그것’, 그 삶이라는 한 식물의 무게가 묵직했다.

주인은 오늘 공사에서 온실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열선을 놓아야 해서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고. 이제 가을 초입이지만 가게 주인도 나도 겨울을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발코니를 염려하자 주인은 아무래도 웬만한 화분들은 집 안에 들이는 편이 좋으리라 충고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고 동의했는데, 갑자기 주인이 “아, 식물이 많으시군요!” 하며 동지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집 안으로 들이라고 하자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제가 봤다고요!” 사실 지금 내 발코니는 식물 모두를 실내로 들이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식구들이 늘어 있다.

주인이 테이프를 여러 번 감아 박스 손잡이를 만들어준 덕분에 오는 길은 편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창밖 풍경을 보다가 나는 오늘의 화원 주인은 예리한 관찰력과 상당한 생활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 사람을 빈 가게에 두어도 될지 안 될지쯤은 자기 역량으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매장 공사쯤은 직접 드릴과 망치를 들고 해치울 수 있는, 괴근 하나가 여기로 오기까지 거쳐야 할 여러 사람의 노동에 대해 기억하고 그것을 사가는 이들에게 일깨우는, 겨울을 함께 걱정하다가도 결국 그렇게 대책 없이 식물에 빠져버린 또 하나의 가련한 ‘식물 집사’에게 적절한 위로와 응원을 건넬 수 있는.

마지막에 그는 해가 지면 괴근식물이 ‘퇴근’을 하리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자기 예상에는 내가 그 장면을 본다면 소리를 지르며 경탄하리라고. 나는 그 퇴근이란 대체 뭘 말하는지 물어봤지만 그는 보면 딱 알 거라고 나중에 여유가 되면 사진으로 찍어 자신에게도 보내달라고만 하고 뒷말을 아꼈다.

집으로 돌아가니 어느새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외출을 할 수 있어서 좋았고 그것이 ‘문래’라서 좋았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문래가 소설이 오는 자리, 글쓰기가 시작되는 동네이니까 직접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그 근처 자리라도 갔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새 작업을 전혀 할 수 없었던 터라 그런 감회는 소중했다. 해가 지자 놀랍게도 괴근식물이 틔우고 있던 잎들이 확 오므라들었다. 마치 딱! 하고 박수를 한번 친 사람의 손처럼, 야 이제 퇴근! 하고 외치며 의자에서 일어서는 동료의 알림처럼, 아 이제 다음 컷의 시작입니다, 하고 슬레이트를 치는 방송사 스태프의 동작처럼. 그렇게 삶이라는 덩어리가 내 발코니에서 첫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김금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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