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익선동 한 식당에서 팔았던 ‘호박인절미’. 박미향 기자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황사가 묻지 않은 찬 바람이 반갑습니다. 칠링을 잘한 스파클링 와인 같은 날들이죠. 이런 계절엔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전 오래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립습니다. 외할머니의 깨강정과 땅콩강정 맛이 입안에서 삼삼하게 맴돌지요.
그저 ‘노인네’ 정도로 취급했던 우리네 할머니가 최근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할메니얼’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죠. ‘할메니얼’은 할머니와 밀레니얼 세대의 합성어로, 뉴트로(복고풍) 열풍이 더 촘촘해진 거로 트렌드 연구자들은 해석합니다. 철 지난 유행처럼 여겼던 할머니의 음식, 쑥떡·인절미·미숫가루·양갱 같은 것들을 밀레니얼 세대가 새롭게 해석해 추종하고 있다는 겁니다. 식품업계는 이런 흐름을 빠르게 간파하고 인절미 흑임자 케이크, 흑임자라떼, 미숫가루 아이스크림, 순두부콘 등을 출시해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는군요.
이런 ‘할머니’ 열풍은 우리만의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외에선 ‘그래니 시크’ ‘그랜드 밀레니얼’이란 용어로 대표되는 유행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답니다. ‘그랜드마더’(할머니)의 생활문화인 꽃무늬 벽지, 고색창연한 찻잔, 레이스 장식품, 손뜨개 니트 등이 패션의 최전선 주자로 등극한 겁니다.
‘할메니얼’ 때문에 외할머니의 음식을 곰곰이 더듬어봤습니다. 깨강정 이외에도 외할머니는 주름진 손맛으로 여러 음식을 차리셨지요. 질기다 싶을 정도로 괄괄한 풀 쪼가리로 비빔밥을 만들고, 거칠다 못해 깔깔한 고구마순 껍질을 벗겨 반찬을 내놓으셨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백석이 찬양한 슴슴한 맛이자 기타오지 로산진이 추구했던 ‘무미의 맛’이더군요.
할머니 음식들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모두 채식입니다. 사실 우리 옛날 밥상은 대부분 채식이지요. 우리의 영혼엔 채식이 얇고 넓게 스며 있었던 겁니다. 이번주 ‘30일 채식 체험기’를 보내온 송호균 객원기자는 “한식이 비건에 더 유리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채식엔 우리 할머니들의 손맛이 깃들어 있습니다.
박미향 팀장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