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감각하고 생각하는 일은 이상하게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되곤 한다. 머무는 일이고 또 떠나는 일이라서일까. 비슷한 계절이 반복하지만 똑같은 계절이 없듯이. 올해도 가을이 왔다.
제이(J)와의 인연을 설명할 때마다 종종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그는 내가 제일 오래 만난 사람이고, 우리 사이에는 15년의 우정이 흘렀다. 나는 과거를 극복의 대상처럼 여겼고, 늘 떠나고 지우는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한번 떠난 동네와 사람과 기억을 다시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과거는 현재에 엉겨 붙는 것. 발목을 잡는 늪처럼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게 하는 것. 나는 미련보다 외면에 능했고 한번 했던 절연을 다시 복구하려고 했던 적이 없다. 너는 몹시 냉정하다는 말과 너는 정말 다정하다는 말을 동시에 들으며 산다는 건 꽤 혼란스럽기도 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스스로를 놓치는 때가 오면 제이에게 연락을 한다. 그것은 제이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땐 거의 매일 붙어 있던 우리는 이제 서른을 넘겼고 1년에 한두 번 만난다. 사람과의 관계를 타인에게 자랑하는 일만큼 권력적이고 쓸데없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크게 아프거나 다쳤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을 내게 묻는다면 여전히 제이다. 그는 나의 바닥을 안다. 나도 그의 바닥을 안다. 그리고 우리의 바닥은 어쩐지 비슷한 시간과 장소에 있다. 주변에 그를 설명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친구’라고 말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복잡한 기분은 아마 친구라는 단어의 깊이가 얕아서 오는 답답함일지도 모르겠다.
추석 다음 날, 제이의 연락이 왔다. 반년 만이었다.
여름과 가을이 뒤섞이는 밤. 제이의 옥탑방이 있는 빌라 앞에 도착하고 걷어 올렸던 소매를 풀어 내렸다. 지면의 온기와 공중의 냉기가 맞닿아 발목에 걸려있었다. 투명하고 검푸른 공기가 만든 잔잔한 수면을 걷는 기분이 시원했다. 빌라에는 자전거와 화분과 망가진 옷장과 잘 마른 시래기와 쌀 포대 같은 세간들이 꽉 차게 늘어서 있었다. 옥탑방에 다다를 즈음, 제이의 것이 분명한 물건들이 보였다. 드럼 페달과 부러진 드럼 스틱과 보면대들. 제이는 드럼 연주자였다. 옥탑방의 문을 열자 6평 남짓 좁은 방에서 탁상 위에 통닭 두 마리와 소주 맥주를 펼쳐놓은 제이가 있었다.
그와의 역사를 여기에서 전부 열거할 수는 없겠다. 다만 내가 <죽은 시인들의 사회>를 보고 카르페디엠을 마음에 품거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너무 헷갈리는 족보와 분량 앞에서 골머리를 앓다가 몇 번이고 패배할 때, 제이는 유튜브도 없던 시절에 머리를 이상하게 기르고 땀이 차면 찢는 방법 외에는 벗겨지지 않을 것 같은 옷을 입은 외국 밴드의 공연 실황을 구해 반복해서 보고 좁은 연습실에 틀어박혀 악기와 싸웠다. (싸웠다는 표현이 맞다. 그는 운동을 좋아했고 굵은 팔뚝과 다소 친절하게 보이지 않는 얼굴을 가졌고 드럼은 기본적으로 두들기고 때리는 악기다.) 다만 우리가 <미션 임파서블>과 <제이슨 본> 시리즈를 함께 즐겼고 어른들 몰래 해야 했던 일들을 같이하거나 덮어주는 유일한 사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제이는 그때의 또래들에게 다소 위압감을 주는 외모였고 그도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이용했다. 그런 그가 나와 같이 자장면을 먹으며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고 <쏘우>를 보다가 무섭고 징그러워서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내고 울었던 일은 내가 덮어준 그의 비밀 중 하나다.
나 결혼해. 제이가 말했다. 셀프 인테리어로 천장과 바닥의 낡은 몰딩을 뜯고 회색 페인트를 바르고 없던 화장실을 만들고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골랐을 제이를 상상하던 중이었다. 결혼이라니. 언제? 겨울에. 결혼식은 언제 할지 모르고. 밴드는? 해체했지 뭐. 제이는 담담하게 닭 다리를 뜯고 물컵에 담긴 소맥을 비웠다.
드럼이라는 악기는 특성상 독주회를 하기 힘든 악기다. 단독으로 나서서 멜로디를 이룰 수 없고, 무대에서 실연을 펼치는 공연이 아니면 아티스트 단독으로 주목을 차지하기 힘든 악기다. 물론 제이도 공연 ‘난타’ 열풍이 돌 때 리듬악기로만 구성한 팀으로 해외를 돌곤 했다. 나름 국내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던 셈이다. 그가 마지막 기회라고 스스로 다그치며 3년여를 매진했던 록 밴드는 기획사에서 거금을 들여 록 음악의 출생지라고 여겨지는 영국에서 활동을 노렸지만 코로나 사태로 모두 무산됐다. 국내 활동을 시작했지만 제이의 밴드는 장르 중에서도 헤비메탈 풍의 록을 연주했고 한국의 특성상 헤비메탈은 대중의 인기를 얻기 힘들었다. 해외를 염두에 두고 앨범의 모든 곡이 영어로 작사 되었다는 건 활동을 더욱 힘들게 했고, 기획사는 제이의 밴드에 더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사실상 공연산업이 마비된 지금, 그는 생활을 위해 입시생이나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설 강사를 했다. 그전부터 수업을 하긴 했지만 번 돈을 모아 악기를 샀다. 그러나 이제는 강사라는 정체성만 남은 셈이다. 요즘은 그마저도 어려웠다. 정부에서 발표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제이의 생활에서는 폭격 사이렌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코로나가 터질 줄 누가 알았겠어. 억울한데, 또 생각하면 나만 억울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억울하고 분해. 그런데 생활은 해야지. 사실 이렇게 끝나니까 어쩌면 신의 계시 같기도 해. 이 정도면 너 그거 하지 말라는 얘기 아니야? 연주자는 수명이 짧아. 벌써 나보다 손 빠른 애들 많아.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도 고집부릴 만큼 부리면서 했고. 애들 가르치면서 가끔 쟤들은 어떡하지 싶기도 해.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근데 내가 먹고살려면 그런 말을 못 하잖아. 그게 참 그렇지. 음악 하려는 사람도 많고 음악 가르치는 대학도 많은데 음악을 할 데가 없어. 음악 하려다가 다 강사 하는 거지 뭐. 아무튼, 우리 엄마 속 뒤집는 거 그만하고 싶기도 하고. 엄마, 환갑이다.
자신이 필요 없어진 세상을 인정하는 데에는 어떤 크기의 용기가 필요한가. 사람은 어떻게 절망과 희망을 혼합하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 모든 걸 단순히 시간에만 맡겨도 좋을까.
어린 우리는 아마도 꿈을 무기처럼 쥐고 있었을지 모른다. 주위를 희생시키더라도 눈치 없는 척하면서, 그것을 휘두르며 초라하고 외로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보편적 또래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분류하는 제도가 있었고 어렵지만 걸어가면 갈 수 있는 미래가 있었다. 물론 걸어간다고 전부가 도착하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고, 이제 제이는 젖은 땅에서 곪아버린 발을 멈추기로 했다는 듯이 말했다.
혼인신고할 때 증인 해달라는 말을 꺼낸 제이의 표정은 내가 아는 표정이었다. 그건 어린 우리가 철없이 꾸몄던 약속. 제이는 아무렇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취기로 투덕거리는 제이는 내가 언제나 누렸던 평범하고 안전한 우정과 다르지 않았다. 임대주택을 위한 열네장의 서류에 대해 가르쳐주던 제이는 어쩐지 신이 나 보이기도 했다. 제이가 아무렇지 않았으므로 나 역시 아무렇지 않았다.
아직 가을이 완전히 도착하지 않아 밤거리에 낙엽은 없었다. 그러나 낙엽을 생각했다. 옥탑방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처음으로 춥다고 느꼈다. 오늘은 낙엽이 있는 곳을 골라 밟았을 텐데. 마른 잎사귀가 부서지는 소리와 머리가 헐거워진 가로수 밑을 오래 걷다 보면 마치 나무의 위를 걷는 기분이 된다. 겨울을 보내고 나무는 계절과 바꾼 새로운 잎을 달겠지. 문득 낙엽은 낙엽이 원하는 만큼의 삶을 다 살고 떨어졌을까 생각한다. 누군가의 결혼에 증인이 되는 일은 처음 해보는데. 어색한 기쁨은 잔잔한 슬픔 같기도 하다. 아, 축하한다는 말을 안 하고 나온 것 같은데. 그러나 필요하다면, 나는 그의 모든 삶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그곳이 세상의 맨 뒷줄일지라도 손을 번쩍 들고서는 말이다.
최현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