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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쓰게 될 것

등록 2020-11-19 07:59수정 2020-11-19 10:54

살리려다 죽였다고 말하는 엄마
어느 날 발견한 엄마의 총
때가 되면 알게 된다는데….
일러스트 백승영
일러스트 백승영

노란색 대문을 열면 좁은 마당이 나왔다. 낮은 담벼락 아래에서 채송화와 봉숭아와 앵두나무가 자랐다. 수돗가를 지나 갈색 현관문을 열면 벽과 바닥에 다양한 색깔의 타일을 붙인 커다란 주방이 나왔다. 정면의 싱크대 위에는 가로로 기다란 창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그릇을 넣어두는 수납장, 왼쪽에는 냉장고, 냉장고 옆에는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방은 주방만큼–이불을 나란히 세 채 깔아도 자리가 남을 만큼–넓었다. 방문을 등지고 보았을 때 왼쪽 벽에 붙은 창은 텔레비전만큼 작았고 오른쪽 벽에 붙은 창은 주방의 창처럼 가로로 길었으며 창 너머로 야트막한 동산이 보였다. 방은 아침에 가장 밝았고 태양이 기울수록 조금씩 어두워졌다. 방에는 옷장과 서랍장과 좌식 책상, 좌식 책상 위의 라디오, 수납장 위의 텔레비전과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싸고 우아한 일인용 의자가 있었다. 방학을 하면 나는 그 방에서 혼자 숨바꼭질이나 땅따먹기나 보물찾기나 시장놀이나 학원놀이나 가수놀이를 했다. 아침을 먹고 방학 숙제를 하고 점심을 먹고 각종 놀이를 하고 오후 네시쯤 낮잠을 잤다. 짧은 잠에서 깨면 형광등을 켜고 라디오를 틀었다. 저녁 여섯시에는 사연 소개도, 초대 손님도, 광고도 없이 기이하거나 평화롭거나 우울한 음악을 연이어 틀어주는 방송이 나왔다. 그 방송이 끝날 때쯤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방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마다 새소리가 들렸다. 집 안 어딘가에 새가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선명하게. 나는 비싸고 우아한 의자를 밟고 올라가 기다란 창 바깥을 관찰했다. 처마 아래 모서리에 작은 둥지가 있었다. 참새는 그곳에 알을 낳았다. 알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아기 새가 나타났으니 알도 있었겠지. 그리고 어느 날 아기 새는 엄마를 기다리다가 둥지에서 떨어졌다. 그 과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기 새가 땅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걸 봤으니까 죽어서 바닥으로 떨어졌거나 바닥에 떨어져서 죽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죽은 아기 새를 고양이가 물어가는 것도 봤다. 나는 비싸고 우아한 의자에 앉아서 한참을 고민한 뒤 좌식 책상 밑에 넣어둔 방석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뒤뜰로 갈 수 있는 길을 찾다가 담벼락과 집의 벽 사이 좁고 어두운 길을 발견했다. 어깨를 웅크리고 방석을 껴안고 숨을 참으며 그 길을 단숨에 통과했고 둥지 밑에 방석을 놓았다. 아기 새가 죽은 채로 떨어진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실수로 둥지에서 떨어진다면 방석 때문에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방석에서 엄마 새를 기다리고 있으면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엄마 새가 돌아와서 아기 새를 둥지로 데려가지 않을까? 그런데 고양이가 방석을 차지했다. 고양이는 방석 위에서 낮잠을 잤다.

어느 날부터 아침이 밝아도 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양이도 사라졌다. 꾀죄죄한 방석만 거기 남았다. 나는 내가 보았던 것들을 떠올렸고 내가 방석을 저곳에 두어서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생각과 싸웠다. 나는 한명인 채로 여러명이 되어서 내가 나와 했던 모든 놀이에는 도둑도, 사기꾼도, 비겁자도, 파렴치한도, 우는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한명인 채로 여럿이었던 나는 언제나 웃고 아프지 않고 다정하고 정직하고 친절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왜냐하면 내가 나를 속이거나 훔치거나 아프게 하거나 떠나버리면 놀이를 이어갈 수 없으니까. 마침내 나는 혼자 하는 모든 놀이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겨울이면 엄마는 바깥이 깜깜할 때 나가서 깜깜할 때 돌아왔으며 쉬는 날에는 환한 방에서 이불로 눈을 가리지 않고도 아주 끈질기게 늦잠을 잤다. 나는 햇빛을 피해 다니거나 햇빛을 모으고 다니는 엄마를 상상했다. 엄마가 햇빛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궁금해서 엄마에게 물어봤는데 엄마는 그런 건 생전 처음 생각해보니 대답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골똘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근데 너 키가 좀 큰 것 같다.

엄마는 내게 벽에 뒤통수를 대고 똑바로 서라고 시킨 다음 손바닥으로 나의 정수리를 꾹 누르면서 연필로 벽지에 작은 선을 그었다. 나는 벽에서 물러났고 엄마는 줄자를 이용해 벽의 바닥부터 연필로 표시한 선까지 길이를 쟀다. 나는 엄마의 키를 재고 싶다고 말했고 엄마는 벽에 뒤통수를 대고 섰고 나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 엄마의 정수리를 손으로 꾹 누른 다음 연필로 선을 그었다. 나는 자랐고 엄마는 작아졌다. 엄마는 작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이 센티미터 작아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일이 센티미터 자라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자라는 건 아주 큰 의미가 있지.

그럼 작아지는 것도 아주 큰 의미지!

엄마는 다 커봐서 괜찮아.

나는 점점 작아지다가 도토리만큼 작아진 엄마를 상상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보들보들하고 따뜻하고 예쁜 주머니를 만들어서 도토리만큼 작은 엄마를 주머니에 넣어서 늘 가지고 다녀야지. 엄마가 꺼내달라고 하면 꺼내주고 햇빛을 쐬게 해줘야지. 사탕을 가루로 만들어서 줘야지. 사람이 늙어도 작아지기만 할 뿐 죽지 않는다면, 계속 작아지다가 먼지처럼 되어서 더는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게 바로 이별이라면 늙은 몸을–나는 늙어서 죽은 몸을 상자에 넣어서 땅에 묻는 걸 본 적 있었다–남겨두고 죽는 것보다는 훨씬 좋을 것 같았다. 다음날까지 그와 같은 상상은 이어졌고 마침내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집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아주아주 조그마한 할머니 할아버지를. 나는 가구와 옷과 물건을 몽땅 들춰보고 열어보고 젖혀보고 살펴보다가 그걸 찾아내고 말았다. 총. 아름다운 총.

우리 집 주방에는 커다란 고무 대야가 있었다. 엄마와 내가 무릎을 구부린 채 마주 보고 앉아서 몸을 담글 수 있는 크기였고, 그게 바로 우리의 욕실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커다란 솥에 물을 가득 끓이면서 온수를 틀어 대야 속을 채웠다. 온수는 대야를 채우는 속도로 미지근해졌으므로 마지막에는 팔팔 끓인 물을 대야에 부어야만 비교적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엄마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얼굴을 적시며 오늘은 너무 많이 죽였다, 오늘은 완전히 죽이지 못했다, 오늘은 살렸다 살린 것 같다, 오늘은 죽지도 살지도 못했다, 등등의 말을 중얼거렸다. 뭘 죽이고 뭘 살렸느냐고 물어보면 엄마는 나중에 내가 다 크면 말해주겠다는 하나 마나 한 대답을 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다른 질문을 했는데,

오늘도 많이 죽었어?

그런 것 같아. 많이 죽었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오늘은 좀 살렸어?

아니. 살리고 싶었는데 당했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일이 오는 거야.

살리는 방법은 뭐야, 엄마?

나도 알고 싶어.

죽이는 방법은?

살리려고……살리려다가.

살리려다 죽였다는 대답은 슬펐다. 엄마는 죽이려다 살렸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따뜻한 물속에서 엄마는 무척 지쳐 보였고 물이 식는 속도로 점점 시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말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 엄마가 나가면 문을 잘 잠갔고 혼자서는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엄마가 차려놓은 음식 말고는 함부로 먹지 않았으며 엄마 아닌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를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비밀도 있었다. 나는 지루했다거나 무서웠다거나 두근두근했다거나 어쩔 줄 몰라서 울었다는 말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다. 아기 새와 고양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나의 많은 상상들도 말하지 않았다. 비슷한 이유로 엄마 역시 내게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죽여서 끔찍하다거나 살리지 못해서 참담하다거나 오늘은 무척 힘들다는 말 같은 거. 나는 엄마가 시드는 게 싫었고 갑갑함을 느꼈고 방법이 있는데도 엄마가 모르는 척하는 것만 같아서 어느 날은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

엄마, 총 있잖아. 그걸 쓰면 되잖아.

엄마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엄마가 의자 밑에 숨겨 놓은 거 내가 찾았어. 의자 밑에 상자가 붙어 있어서 열었더니 거기 보자기로 감싼 총이 있었어.

엄마는 그걸 꺼내봤느냐고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엄마는 따듯한 물을 내 어깨에 끼얹으면서 한동안 침묵했다. 나는 잠깐 후회했으나 엄마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엄마가 숨겨 놓은 그것을 이제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엄마도 알았으면 좋겠어.

그것참 예쁘지.

엄마가 입을 열었다.

응. 예뻐. 정말 예뻐.

손에 쥐어 봤어? 무겁지 않았어?

하나도 무겁지 않았어. 차가웠어.

언젠가 알려줄게. 그걸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

언젠가는 언제야?

나도 몰라. 그런 때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

근데 그건 엄마 거야?

응. 내 거야.

내 총은 없어?

생길 거야.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엄마 대답은 모조리 이상해.

엄마는 따뜻한 몸으로 나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엄마에게 총이 있다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면 안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물었다. 왜 말하면 안 돼? 잡혀가니까?

엄마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사람들이 알게 되면 엄마가 그것을 정말 써야 할 테니까.

목욕을 마치고 깨끗한 수건으로 몸과 머리를 닦고 엄마가 끓여준 코코아를 마시고 이를 닦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형광등을 끄고 책상 위 노란 불을 켜고 좌식 책상 앞에 앉아 얇은 책을 펼친 다음 공책에 무언가를 천천히 적었다. 나는 이불을 덮고 모로 누워 엄마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불에서 나와 비싸고 우아한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창밖을 봤다. 눈송이가 흩날렸다. 참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나풀거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내가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비밀들을 떠올렸다. 엄마가 펼쳐놓은 얇은 책에 담긴 불규칙한 계단 같은 문장들을 몰래 읽은 적이 있지. 모르는 단어가 없는데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어서 많이 읽었고 많이 읽어서 외워버렸고 외웠으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나는 그 문장들을 한 손에 구겨 쥐고 힘껏 집어 던진다. 그것은 무언가를 와장창 깨트리고 와르르 무너트리고 와자작 부서트린다. 나는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서 밖에서 잠근 문을 열고 나가 진짜 도둑과 사기꾼과 비겁자와 파렴치한과 우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을 만난다. 나는 살리려다가 죽이고 죽이지 못해 살린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총을 갖게 된 오늘 불현듯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방석.

어둠 속 방석 위에 눈이 쌓였다. 방석은 얼고 녹고 마르고 다시 젖으며 점점 낡고 더러워졌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와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가 그것을 쓰레기처럼 치웠다. 어째서 그런 곳에 방석이 있어 낡고 더러워졌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점점 자라던 내 마음은 바로 그렇게 되었다. 나는 총을 쓰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방법으로 엄마보다 많이 살릴 것이다.  최진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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