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내게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의 의례를 삶에 배치해두는 취미가 있다. 가령, 바닷가를 방문할 일이 생기면 모래 위에 발자국을 찍고, 바다가 날름거리며 발자국을 잡아먹는 일을 지켜봐야지만 그 바다에 다녀왔다고 스스로 인정한다거나, 어디서든 글을 쓰는 책상에 앉자마자 읽지도 않을 책을 세권 이상 늘어놓는 것 같은 거다. 거리에서 낙엽을 한장 훔치는 건 가을날 의례이고, 봄과 여름에도 계절을 맞이하는 혼자만의 의례가 있다. 습관이나 강박이라고 부르지 않고 의례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통과하기 위한 스타팅 자세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의례를 폐기하고 새로운 의례를 만들 때도 있다. 이런 취미는 은밀하고 작지만 확실한 성취를 주는데, 정신 속 타임라인을 일반적인 흐름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나만의 리듬을 갖는 방법이기도 했다. 밤에만 무언가를 쓰고 읽는 탓에 나는 자주 일반적인 생활 흐름에서 물러나 생활해야 할 때가 있었고, 과연 내가 잘살고 있는 게 맞는지, 번민과 조바심에서 독립적인 자존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일이 아닌가 싶지마는.
겨울을 인지하고 맞이하는 나의 의례는 두 가지였다. 작은 눈사람을 만드는 일과 구세군 자선냄비에 돈을 넣는 일. 보통 눈사람을 만드는 일은 큰 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12월 초입부터 지하철 역사를 지날 때면 구세군 자선냄비는 쉽게 볼 수 있었다. 겨울에는 외투에 주머니가 많으므로 가방 없이 카드 하나와 신분증 하나 달랑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만, 12월 초입 겨울이 시작했다는 느낌이 오면 만원 한장을 함께 챙겼다. 이건, 오만한 자기만족이다. 나는 연말을 맞아 누군가를 돕겠다는 선의가 아닌 올해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위치와 여유가 있다는 만족감을 구입하기 위해 자선냄비 앞에 섰다. 고작 만원으로, 냄비에 지폐를 넣고서는 만족감을 최대한 감추는 표정을 하고 지나갔다. 나는 나의 위선을 외면하면서 자존감 충족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러다 이 ‘냄비’라는 사물을 따끔하게 자각한 일이 있었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구세군 사관이 성탄을 맞아 도시 빈민들을 위해 ‘이 솥을 끓게 합시다’라고 써 붙인 냄비로 모금 활동을 시작한 데에서 유래하여 지금도 냄비처럼 생긴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한 번도 인지하지 못한 이 ‘냄비’ 때문에 나는 후회와 패배를 겪었다.
12월. 영화 <가버나움>(2019) 이야기를 잠깐, 해야만 할 것 같다.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열두살 즈음의 레바논 소년 ‘자인’은 자신의 한살 아래 여동생과 강제로 졸혼하고 3개월 만에 임신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의 다리를 칼로 찌른 혐의로 수감된다. 그러다 감방의 공용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아동학대를 주제로 하는 공개방송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다고 인터뷰한다. 이는 레바논 사회의 반향을 일으켜 결국 공식 재판이 열리게 된다. 자신의 부모와 함께 선 재판에서 재판장은 왜 부모를 고소하고 싶으냐고 묻는다. 자인은 대답한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요.”
연말이면 으레 거리에 등장하는 구세군 자선냄비. 게티이미지뱅크
국내 관객 14만명 관람을 기록했으므로, 줄거리를 전부 소개하는 건 큰 의미가 없겠다. 레바논 출신 나딘 라바키 감독의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예수께서 사역하여 신의 치유와 복음을 전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아 벌을 받았다고 성경에 기록된 지역, 기독교 성지로 여겨지는 지금의 레바논 갈릴리 호수 근처 지역인 가버나움을 배경과 제목으로 차용한 데에서 드러나는 상징성. 참혹한 내전과 그로 발생한 난민 문제와 민족 관습, 부모의 무지로 인한 졸혼을 비롯한 수많은 폭력으로 희생당하는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인권의식. 전문 배우가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 난민과 불법체류자들을 섭외하고 배역을 맡겨 마치 통째로 다큐멘터리를 보는 착각이 들지만, 이 영화는 분명한 목표를 위해 허구를 구축하고 드라마와 음악을 설치해두는 영화 연출 문법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영화는 영화다.
그러니까, 영화가 의도한 바에 설득당한 문제의식을 여기서 설파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며칠 잠을 설치며 나를 울게 했던 장면이 있었다. 극 중에서 자인은 여동생을 팔아버린 부모에게 증오를 느끼고 가출하여 떠돌다가 불법체류자 ‘라힐’과 그의 갓난아이 ‘요나스’를 만난다. 라힐은 일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수유를 해야 하므로, 여자 화장실 한 칸에 아이를 숨겨두고 허름한 유원지 식당 청소를 하다가 떠도는 자인을 거두게 된다. 빈민촌에 있는 자신의 컨테이너에서 자인에게 요나스를 맡기고 새로운 체류허가증을 위조하기 위해 시장에 간 라힐은 경찰 검문에 걸려 체포된다. 며칠을 돌아오지 않는 라힐. 옆집 아이가 먹던 젖병의 모유를 훔치고 얼음에 설탕을 뿌려 먹으면서 요나스와 허기를 달래던 자인은 훔친 스케이트보드에 큰 냄비를 붙이고 노끈을 묶어 거기에 요나스를 태워 끌고 다니며 라힐을 찾아 나선다.
나는 그 냄비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현장에서 섭외한 난민 소년이 너무나 실제로 느껴지는 연기를 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가 난민이어서가 아니다. 어른과 이 세계가 거리에 내다 버린 삶과, 삶보다 더 무거운 증오를 매달고도 차마 자신의 세상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가난한 생명을 버리지 못하는 아이의 슬픈 순수 때문도 아니다. 나는 음식이 담겨 있고 그 음식을 나누기 위해 국자가 부지런히 오고 가야 할 냄비에 아이가 담겨 있음이 견딜 수 없었다. 냄비에 담겨서 잠이 든 아이의 얼굴과 잠든 아이를 어른들의 정강이를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끌고 다니는 아이의 얇은 팔뚝을 참을 수 없었다. 감독의 잔인한 연출이었다면 비판을 멈추지 않고 싶었다. 창작자가 불행을 본떠 모형으로 만드는 일은 가장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칼이니까. 영화가 개봉한 당시는 한창 시리아 난민 문제가 세계의 화두였고, 나는 구글링 몇 번으로 그 땅에 실제로 존재하는 자인의 냄비를 여러번 목격할 수 있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하게 실존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단지 재현하여 보여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감독을 비판할 수는 없었다. 장르 불문하고 창작자가 견지해야 할 자세 중 하나는 타인의 작품에 충분히 감동하고 공감하되 재빨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애초 감동과 공감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지 않는 편이 좋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창작자에게는 자신만의 고유성을 위해 후퇴할 수 없는 싸움의 장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겨울, 라면을 끓이는 냄비 앞에서도 종종 울었다. 하필이면, 냄비였다.
이 글을 적는 지금, 지면을 빌려 연말을 맞아 기부하자거나 이웃돕기를 실천하는 공익 캠페인을 벌이고자 함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모든 선의를 잃는 세계. 나는 그것이 실제로 도래할까 몹시 두렵다. 그것에 빚지고 살아남은 일이 내게도 있다. 우리는 애정과 평화가 아닌 분노와 절망으로도 사슬을 엮어 무한한 수갑을 만들 수 있으므로, 어쩌면 냉소로 읽을 누군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고루한 두려움을 꺼내 말해보는 이유는 내가 새롭게 세운 겨울의 의례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선의를 믿어보는 것. 믿어보자고 말하는 것. 나는 그렇게 허름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듯, 12월을 통과하고 있다.
얼마 전 낭독회에서 만난 동료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자유란, 내가 사랑하는 것에 구속된 상태라고. 사람은 자유에 지속적으로 머물 수 없으므로, 자유는 사람이 정말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집에 육체를 구속해두는 일이 최선의 선의로 여겨지는 요즘, 나는 그의 말을 곱씹는다. 그가 말한 바는 마음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어디에 담겨 있을까. 전부 망가진 것만 같은 올해를 지나고 각자의 냄비를 끌고 도착한 곳에서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최현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