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에는 ‘핫한’ 회사가 많습니다. 그 회사들에서 ‘주류’는 개발자들입니다. 구성원 반수 이상이 개발자인 회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누군가는 그들을 중심으로 계층이 나뉜다는 말도 하더군요. ‘설카포(서울대·카이스트·포항공대) 출신 스타 개발자 〉 그 외 개발자 〉 비개발 직군’ 순이라고 말이죠. 이처럼 이 동네 회사도 순위가 매겨지기도 합니다.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민)’과 같은 표현으로 대표 기업을 나열하기도 하고요.(최근 들어 쿠팡이 파격적인 대우를 앞세우면서 ‘쿠~네카라배’로 바뀌었다는 분위기도 관측됩니다.)
이들 기업이 ‘취준생 입사 희망 1위’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 괜찮은 연봉, 자유로운 기업 문화, 뛰어난 동료들과 협업해 성장할 가능성 등 여러 요인이 ‘판교 밖’에 견줘 나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근무 환경이 좋은 회사가 많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마냥 좋게만 알려지는 것도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취준생 입사 희망 기업 1위’ 류의 기사를 보면, 판교 혹은 아이시티(ICT·정보통신기술) 업종 전반에 관해 피상적인 사실들만 알려져 환상이 덧씌워진 것 같아요. 그래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사실 몇 가지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미디어들은 ‘스타 개발자’ 이야기들을 주로 다룹니다.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행사해 시이오보다 많은 보상을 받거나 하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외부인들은 그걸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죠. 물론 스타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창업 초기에 합류했거나, 사업 성공에 큰 기여를 해 많은 보상을 받기도 해요. 이 또한 보편적인 사례는 아닙니다. 일반 회사원처럼 소시민의 삶을 사는 사람이 대다수고, 비개발직군(코드를 짜지 않거나 이해할 필요가 없는 직무에 종사하는 아이티회사 직원을 통칭)에서 일한다면 더더욱 그럴 확률이 높아요.
대규모 공개채용을 도입한 지 얼마 안 된 회사가 대부분입니다. 대기업에는 공채 문화가 있죠. 기수별로 위계질서가 있거나 연공서열에 따른 대략의 급여 체계를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많이 바뀌었다지만, A라는 회사에서 N연차면 X~Y 정도 직급에서 N만원 정도의 연봉을 받겠구나 짐작은 되잖아요.
판교에는 그런 준거점이 없다시피 합니다. 대다수 기업이 길어봐야 10~20년 내외의 업력을 갖고 있고, 경력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입사 시기에 따른 위계 같은 건 없지만, 전부터 알고 지내던 ‘업계 출신’들끼리 끈끈함을 발휘하기도 하고, 출신학교나 다른 이해관계가 더해지면 보이지 않는 강한 카르텔이 형성되곤 해요. 완전히 다른 업계에서 아무런 배경 없이 이직해 온다면 뜻밖에도 ‘쿨 하지 못한’ 카르텔에 당황할 수 있습니다.
딱 한 번 뚜렷한 준거점이 발동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이직할 때 연봉협상 단계에서죠. 이때 전 직장 연봉은 움직이기 힘든 잣대가 됩니다. 엄청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전 직장 대비 약간 높은 수준의 연봉 계약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줄 가격’이 정해져 있었으니 오래 대화하더라도 만족한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하더라도 급여 차이가 큰 경우가 흔한 이유입니다. 공채 신입보다 경력직 수시 채용으로 입사한 사람의 연봉이 낮은 ‘웃픈’ 상황도 발생하죠. 요즘 유행하는 책 제목처럼 ‘규칙 없음’입니다.
정년에 다다른 선배들을 유니콘만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또한 업계가 형성된 지 오래되지 않아 나타나는 현상인데요, 90년대 ‘닷컴’ 시절에 청년의 혈기로 사업을 시작한 1세대 창업주들의 나이가 대략 50대 초중반입니다. 대기업에서라면 ‘허리’ 정도 위치인 40대 중반은 판교에서 ‘노령층’에 가깝죠. 당연히 자녀 학자금 같은 복지 항목이 아예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혜택을 받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20대 말~30대 초반의 구성원들이 워낙 많다 보니, 40대 중후반에 ‘치킨을 튀기러’ 퇴사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아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 제목을 좀 더 혹독하게 차용한다면 <중장년을 위한 판교는 없다>와 같이 표현할 수 있을까요? 검었던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린 사람들이 판교에 좀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백세 시대지 않아요. ‘롱테일 법칙’이 지금의 인터넷 세상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 것처럼 말이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오랫동안 행복해지고 싶기에, 입사 희망기업 순위를 꼽거나 서열화에 관심을 갖는 거겠죠. 분명한 점은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게 묵묵하게 각자 역할을 해내는 알려지지 않은 다수가 ‘지금의 판교’에 동력이라는 점입니다. 참, 요즘 들어서는 모든 서열화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한마디 표현이 생겼더라고요. “나 몇 년 전에 산 집, 엄청 올랐다.” 흑, ‘집못미’(집 못 사서 미안)!
잇(IT)문계(판교 아이티기업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