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업계 동료인 네이버 직원의 죽음 앞에서

등록 2021-06-02 10:10수정 2021-06-03 02:40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지난달 27일이었습니다. 한 아이티(IT) 회사 직원이 상사의 괴롭힘과 인격 모독에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인과 일면식도 없지만, 슬프고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기 어려웠습니다. 그의 성품이 온화하고 합리적이었다는 평가들, 원인 제공을 한 것으로 의심받는 상사의 재입사를 반대한 동료들이 많았다는 뒷소문들이 얽히고설켰습니다.

고인의 아이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아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메신저 배경화면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직장인 익명 소셜미디어의 ‘IT라운지’에 문제를 지적하려고 남긴 상당수 게시물은 빠르게 숨김 처리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도와 분노의 목소리가 차고 넘쳤습니다. 늦었지만 언론 보도도 쏟아졌고, 사람들은 선망받는 회사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의아해했죠. 과연 가해자의 품행만이 이번 일의 원인이었을까요? 그의 동료들이 쓴 증언들을 며칠간 지켜보니 뿌리 깊은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근본적인 문제로 인사와 윤리경영 시스템을 무력하게 하는 사내 권력구조를 지적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맥으로 엮이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회사 시스템의 엄정함이었죠. 많은 동료들은 이 사건 전에도 위험 신호는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신호가 제대로 경영진에 전달되지 못한 것이지요. 문득 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부당행위를 고발하는 소원수리 제도가 있었지만, 유명무실했지요.

흔한 말로 ‘인사는 만사’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일을 어떻게 맡기는지가 조직 전반에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작동하기 때문이죠.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피해를 보면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고 침묵하게 됩니다. 지난 2월 판교의 다른 회사에서 일어난 ‘유서 사태’ 이후 터져 나온 목소리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면평가에 조직장의 횡포를 적었더니, 최상위 조직장이 작성자의 실명까지 포함한 모든 내용을 노출해 피해를 보았다는 얘기였죠.

빼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의 인성이 의심된다면 회사는 그 사람을 고용해야 할까요? 걸러지는 경우가 많겠지만, 고위 경영진이 밀어붙일 경우 통제 장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회사들 다 그런 거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업계에서라면 조금 달리 봐야 할 여지도 있습니다. ‘바닥’이 워낙 좁아 용기 있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이직 등 향후 경력 관리에 있어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공포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디지털 전환에 몰두하고 있고, 많은 IT회사들이 수평 문화를 강조하죠. 그래서 MZ세대에게 인터넷 기업들은 취업 희망처로 손꼽힙니다. 그런 곳에서 위계에 의한 괴롭힘이 존재하고, 어떤 경우 고위층의 비호 아래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한 40대 가장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덩치만 키운 어린아이 같은 IT업계에 자성할 거리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패거리 문화를 없애라’·‘규칙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하라’·‘위선을 경계하라’. 판교의 여러 회사가 세계적 추세에 발맞춘다며 내놓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보고서들이 아이러니하게 겹쳐 보입니다.

떠난 그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뭐라도 해보겠다며 다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이 열렸고, 분향소에 직접 가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헌화 창구도 생겼습니다.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슬퍼하는 그의 가족들 앞에 어떤 위로도 부족할 테지요. 깊이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잇문계(판교 아이티기업 회사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숲 여행도 하고 족욕도 하고…당일치기 기차 여행 1.

숲 여행도 하고 족욕도 하고…당일치기 기차 여행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2.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쉿! 뭍의 소음에서 벗어나 제주로 ‘침묵 여행’ 3.

쉿! 뭍의 소음에서 벗어나 제주로 ‘침묵 여행’

[ESC] 지구에서 가장 오래 안 잔 사람이 궁금해! 4.

[ESC] 지구에서 가장 오래 안 잔 사람이 궁금해!

인간이 닿지 않은 50년 ‘비밀의 숲’…베일 벗자 황금빛 탄성 5.

인간이 닿지 않은 50년 ‘비밀의 숲’…베일 벗자 황금빛 탄성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