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몰골로 만났어요?”. 지난해 〈티브이엔〉(tvN) 드라마 〈스타트 업〉에서 투자회사 대표 한지평(김선호)이 주인공 남도산(남주혁)의 데이트 복장을 보며 던진 말입니다. 남도산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죠. 남도산과 함께 ‘삼산텍’을 창업한 그의 친구들도 극 중에서 체크무늬 셔츠를 즐겨 입었습니다.
이런 드라마 속 설정들이 낯설진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웃었어요. 아마도 ‘개발자들은 체크무늬 셔츠를 즐겨 입는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정말 그럴지 궁금했어요. 재택근무를 하다가 판교로 오는 날이면 길거리에서, 엘리베이터와 사무실에서, 식당에서 사람들의 옷차림을 몇 달간 관찰해봤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반이 개발자인 판교에서 체크무늬를 옷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개발자=체크무늬 셔츠’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을까요? 널리 알려진 사실에 저의 추론을 더해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체크무늬는 체스판을 사용하는 보드게임인 ‘체커’가 인기를 얻으며 널리 알려진 이름이래요.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킬트에 쓰인 타탄 무늬를 사람들이 통틀어 체크라고 부른 게 이 무렵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후 영미권의 명문 학교들이 유니폼에 체크무늬를 사용했죠. 한국 사회에서도 아이비리그 스타일을 표방한 몇몇 의류 브랜드들이 체크무늬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남중, 남고를 거쳐 공대에 입학한 옷에 관심 없는 아들에게 부모가 쉽게 사줄 만한 의류는 체크무늬 셔츠 아니었을까요? 적당히 학생다우면서 단정해 보였을 테니까요. 예전에는 ‘공대생 룩’으로 인식됐던 체크무늬 의류가 컴퓨터 공학이 주목받으면서부터 슬그머니 ‘개발자 룩’으로 치환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실제로 판교에서 가장 흔한 스타일은 뭘까요? 저는 깃 없는 티셔츠를 꼽겠습니다. 여름에는 라운드 티셔츠, 찬 바람이 불 때는 후드 티셔츠 정도로 변주되는 것 같아요. 계절에 따라 반바지가 긴바지로 변하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 운동화로 바뀌는 흐름도 반복되죠.
문득 예전에 다녔던 오래된 회사에서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자율 복장을 추구한다지만 티셔츠에 깃이 달려있어야 했고, 언제 있을지 모를 임원 호출에 대비하기 위해 재킷 한 벌쯤은 사무실 옷걸이에 비치해 두는 게 자연스러웠던 곳이었어요. 저는 그 무렵 판교의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반바지에 티셔츠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프로그래밍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로 이직한 뒤 제가 출근하는 모습을 보며 “회사 가는 거 맞아?”라고 묻던 아내의 심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그로부터 며칠 뒤 퇴근하는 모습을 본 장모님은 “자네 오늘 휴가였나?”라고 물어보셨어요.)
몇 달 전,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서 ‘개발자 실력을 평가하는 방법 (신뢰도 100%)’라는 제목의 글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저 또한 프리랜서 개발자 친구나 회사 동료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는데요. 신체적 특징과 액세서리, 복장과 노트북 등을 기준으로 가점 요소를 책정해 실력자를 가늠한다는 우스갯소리였습니다.
요점은 이랬습니다. 거북목 +1점, 비쩍 마르거나 살이 많이 쪘다면 +2점, 스마트워치나 캐릭터 시계를 착용했다면 +1점, 일반적인 시계 브랜드를 차고 있으면 -1점, 스타일리시한 차림이면 -3점, 대충 챙겨 입었다면 +1점, 티셔츠에 혓바닥이나 꼬인 뱀, 눈알 등의 기괴한 모양이 있다면 +3점, 씽크패드나 델, 맥북 프로 등의 고가 노트북은 +1점, 이상한 스티커 하나당 +0.1점. 합계 점수 3점 이상이면 중수 이상, 5점을 넘는다면 고수라는 내용이었어요.
“탈모 +15점”, “하체 비만 +5점”, “흰머리 무시하냐?” 등 160여 개의 댓글을 읽다 보니 웃음을 멈출 새가 없었습니다. 이야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빛나는 센스를 엿볼 수 있었죠. 개발자로 통칭하는 직업 종사자가 많아진 만큼 옷 잘 입는 멋쟁이도 많고, 역설적으로 패션에 관심 없는 디자이너도 존재하는 게 현실입니다. 거울을 보니 저는 신체 조건만으로 3점을 획득했네요. 이참에 코딩을 배워야 할까요?
잇문계(판교 아이티기업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