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그랬다. 나는 해가 높이 뜬 대낮부터 한밤중까지, 다시 새벽빛이 밝아올 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를 즐기는 성정이었다. 대낮에 마시는 맥주와 새벽녘의 찬 소주 맛에는 기존에 마셨던 술맛을 싹 잊게 해주는 중독성이 있었다. 최근에는 ‘어쩔 수 없이’ 음주를 시작하는 시간이 당겨졌다. 마시던 술을 끊고 일어서기에 저녁 9시는 너무 일렀다. ‘어떻게 하면 시간 맞춰 취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생각해 낸 묘안이 낮술이었다. ‘맨날 마시는 그 낮술이냐, 핑계 대지 마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저녁 식사에 반주를 곁들인 뒤 적당히 배가 부를 때 소화를 목적으로, 간단한 스낵에 좋은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칵테일 바를 찾게 된다. 저녁 8시 이후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곳이지만, 요즘 칵테일 바는 다르다. 당겨진 귀가 시간만큼 아쉬워하는 이가 많았던 탓인지 ‘낮술 영업’을 시작했다. 오후 3시부터 문을 여는 곳이 늘었다. 그중 하나가 통인동의 ‘뽐’이다. 이미 바텐더들 사이에서는 ‘전설의 바텐더’라 불리는 임병진 바텐더의 두번째 바다. 그의 첫번째 바, ‘참바’도 근방에 위치한다. 지난해 말에 문을 연‘ 뽐’은 ‘사과’라는 뜻의 프랑스어 상호처럼 프랑스 사과 술 칼바도스를 중심으로 위스키와 브랜디, 칵테일을 취급한다.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빛이 낯설었다. 늘 어둑하던 칵테일 바가 이렇게 환한 공간이 될 줄 몰랐다.
‘뽐’에서만 맛볼 수 있는 ‘뽐스 컵’ 한 잔과 여러 종류의 칼바도스를 비교 시음할 수 있는 ‘칼바도스 플라이트’도 주문했다. 대낮에는 생맥주만 마셔도 기분이 좋은데, 이런 분위기에서 제대로 만든 칵테일에 독한 증류주까지 마시면 이미 상황은 종료다.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통장의 잔고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 사람처럼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한 잔 더, 그리고 이어서 또 한 잔을 주문했다.
이렇게 된 김에 대낮 칵테일 바 기행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을지로 3가역 1번 출구, ‘을지로 골뱅이 골목’ 반대편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백반집과 철공소, 인쇄소가 가득하다. 이런 투박한 상권을 지나고 지나 돌고 돌아 발견한 곳이 ‘숙희’다. 허름한 건물 2층, 들어가는 입구에는 한자로 ‘숙희’라고만 적혀 있다. ‘이런 곳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려나’ 하는 걱정은 왜 했을까, 오후 5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도 만석이었다. 적당히 어둑한 조도, 자개장을 사용한 인테리어, 은은한 향이 감도는 실내는 을지로 뒷골목의 숨은 바에서 느낄 수 있는 운치였다.
어차피 마셔야 할 술, 새로운 시대에 맞춰 부지런히 변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조금만 민첩하게 움직이면 다시 즐거울 수 있고, 많이 취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문영(전 <럭셔리> 리빙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