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SNS) 속 배낭을 멘 내 사진에 재미난 댓글이 달렸다. ‘그 커다란 배낭엔 도대체 뭐가 든 거예요?’ 등산 필수 아이템이 궁금했을 수도 있다. 159㎝ 단신 여성이 자신보다 큰 배낭엔 무엇을 넣었을지 의아스러웠을 것도 같다.
배낭 속 소지품은 그 사람을 짐작하게 한다. 100g도 무겁게 느껴지는 등산에선 짐을 줄일수록 미덕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 중에도 최종 선택된 것만 배낭에 남는다. 그 사람의 ‘기호’와 더불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남겨지는 것이다. 어떤 이의 배낭은 본인 몫을 포함해 주변인에게 나눠 줄 먹거리가 가득하다. 누군가는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기거나 자연에서 1박 이상을 머무르기 위해 필요한 야영 장비를 챙기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내 배낭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 바로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들’이다.
산이라는 높고 험준한 공간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낯설었지만, 신선하기도 했다. ‘멈추어 서서’ 한곳에 오래 머무르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만을 향해 가거나 그저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마주하면 그곳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들여다봤다. 평소 무심히 흘려보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숲보다는 나무를, 바위의 크기보다는 색감과 모양을, 나뭇잎의 세세한 결과 바람에 흔들리는 동작까지 관찰하다 보니 잘 알던 풍경도 새롭게 다가왔다. 멈추어야만 보이는 것들, 관찰해야지만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자연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다. 열렬히 산행해온 지난 9년간 한 번도 ‘산태기’(산 권태기)를 겪어본 적 없는 이유다.
나의 산 그림 그리기에 영업(?) 당한 사람들이 ‘나도 그러면 산에서 그림을 그려볼까?’라고 결심해도, 막막하게만 느껴진다고 한다. 미술 전공자인 나도 어려웠으니 그럴 만하다. 그래서 나의 야외활동에 적합한 콤팩트 소묘 키트를 소개한다. 여러 차례 산행 소묘 끝에 나의 스타일에 맞춘 재료 및 도구들이니 참고로 해서 자신의 소묘 키트를 완성해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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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물감 물을 용제로 해서 녹여 쓰는 굳은 물감. 물이 마르면서 특유의 앙금이 생긴다. 물감은 펜이나 크레용보다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지만, 다루는 것만 익숙해지면 빠르게 영감을 기록하는 데 효과적이다. 물감을 섞어 다양한 색을 낼 수 있다. 튜브로 짜서 쓰는 타입과 고체 타입이 있다. (홀베인 수채물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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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트 수채화 물감을 담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 최근에는 화방에도 브랜드별, 색의 개수별로 고체 물감 팔레트 키트를 판매한다. (고넹이화방 나무 팔레트 21x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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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또는 물붓 뚜껑을 닫아 붓의 털을 보호할 수 있는 여행자용 세필 붓을 사용한다. 물통이 따로 필요 없는 ‘물붓’도 있다. 물붓은 야외 소묘에서 특히 편리하고 초심자들이 사용하기에 좋다. (Tintorettto 1337 2, 4, 6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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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수채화 전용지 전지 혹은 2절 사이즈를 구매하여 잘라 사용한다. 손바닥 크기에 뒷면에는 엽서로 되어있는 드로잉북도 있으니 초보자에게 추천한다. (아르쉬 수채화 300g 중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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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티슈, 붓 케이스, 재료를 담을 주머니, 작은 물통 등
다양한 재료가 있고 선호하는 스타일도 제각각이지만,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준비물을 갖출 필요는 없다는 것! 산 그림 초보자라면 작은 드로잉북과 그릴 수 있는 재료 정도면 충분하다. 채색이 부담이면 연필과 펜으로 시작해도 좋다. 물감보다는 비교적 다루기 쉬운 색연필이나 크레용도 좋은 재료다. 또 그림이 사실적일 필요도 없다. 산등성이를 보랏빛으로 칠해도 좋다. 봄볕을 분홍색으로 표현하면 더 특별한 그림이 된다. 잘 그린 그림보다는 재미있는 그림을 목표로 한다면, 그림 그리기가 한결 즐거워진다. 하나씩 시도해보면서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재료와 스타일 찾아가는 재미를 느껴보자.
여행만큼 중요한 것은 나의 여행 기록이다. 그림은 글이나 사진보다 조금 더 주관적이며 추상적인 기록일 수 있다. 하지만 산행들을 돌이켜보면, 다른 것들은 점점 희미해지거나 잊히지만, 화폭으로 담았던 장면만큼은 생생하고 선명하게 떠오른다.
김강은(벽화가·하이킹 아티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