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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산에서 그린 ‘망작’까지 사랑하게 된 이유

등록 2021-03-19 04:59수정 2021-03-19 09:06

김강은 작가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린 낡은 성 그림. 사진 김강은 제공
김강은 작가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린 낡은 성 그림. 사진 김강은 제공

도봉산 자락에서 웅크려 붓질하던 내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림을 잘 그리셔서 좋겠어요. 생각하는 걸 마음껏 표현할 수 있잖아요.” 차분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여성분이었다. 그림쟁이는 종종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미술을 전공하고 붓질을 해 온 지 12년 째. 그런데 사실 스스로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뜻대로 표현되지 않을 때가 더 많고, 결과물이 마음에 드는 때는 더욱더 드물다. 어떨 때는 망했다 싶은 생각에 그 자리에서 그림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는 내 그림을 부끄러워했다.

3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상상만 해도 설렘이 폭발하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순례길.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광활한 황금빛 들판과 큰 배낭을 메고 풍경 속을 걷는 순례자들. 무거운 등짐에 팔레트와 붓과 드로잉 북을 꾸역꾸역 욱여넣은 건, 그곳에서 마주하는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누군가 내 그림을 볼까 봐 신경 쓰였다. 못 그린다고 생각하거나 비웃을까 봐 두려웠다. 학부생 때 내 그림을 잔혹하게(?) 평가한 호랑이 교수님이 곁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림을 그리다가도 누군가 나타나면 황급히 정리하기 일쑤였다.

순례길 첫날 피레네산맥에 오른 김강은 작가. 사진 김강은 제공
순례길 첫날 피레네산맥에 오른 김강은 작가. 사진 김강은 제공

그런 내 생각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을 만났다. 하루 순례를 마치고 숙소 앞 벤치에서 그림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었다. 미완성의 그림들을 살펴보며 에이(A)급 그림과 폐기 처분할 그림을 고르고 있었다. 그은 피부의 순례자가 다가와 그림을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왔다. 찬찬히 살펴보던 그는 한장의 그림을 짚었다. 그 그림을 팔 수 있냐고 물었다. 내 그림을 사고 싶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란 것은 그가 고른 것이 내가 생각한 최고의 망작이었기 때문이다. 울퉁불퉁한 선에 물 조절에 실패해 종이가 한껏 울어버린 배경, 칙칙해져 버린 색감에 우울한 분위기. 쓰레기통으로 갈 뻔한 그림이었다. 결국 그림은 팔지 않았지만, ‘내가 부끄러워한 그림도 누군가에겐 좋은 그림이 될 수 있구나’ ‘내 그림을 사랑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실제로 순례길에서 그림을 그리며 많은 응원을 받았다.

그 후로도 수많은 망작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모두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그때의 자신감 덕에 국내 100대 명산 드로잉을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림은 그릴수록 어렵다. 수채화의 물 조절은 아직도 완벽하게 터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색 조합이 생겼다. 예를 들면 노란색과 붉은색을 가미한 초록색이라든지, 보랏빛을 섞은 푸른색 같은 색들 말이다. 자주 쓰는 표현들도 생겨나고, 푸른 하늘을 보라색으로 표현하는 패기도 생겼다. 거친 돌을 표현하기 위해서 건조한 갈필(빳빳한 털로 만든 붓)을 써보기도 하고, 변화가 필요할 때는 화방에 들러 써본 적 없는 새로운 질감의 종이를 사기도 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명산들은 무궁무진하고, 그림의 세계도 끝이 없다. 이젠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노(NO)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예스(YES)다. 내일은 또 어떤 산에 올라, 어떤 종이에 어떤 색감들을 옮겨 담을지 기대된다.

김강은(벽화가·하이킹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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