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친 후 먹는 ‘혼밥'이 항상 즐겁다는 조영권씨.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일본 만화 <고독한 미식가>(그림 다니구치 지로)의 이야기 구성 작가 구스미 마사유키는 돈가스 먹는 법이 별나다. 남들이 접시 맨 왼쪽에 있는 조각부터 우걱우걱 씹을 때, 그는 가운데 가장 도톰한 부위부터 먹는다. 양배추는 돈가스 양의 최소 5배는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배추의 맛 추임새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오죽하면 양배추 아끼는 주인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악담을 할까.)
조영권(51)씨도 함박스테이크(햄버그스테이크)를 먹는 순서가 특이하다. 일단 고기 위에 있는 달걀부침을 걷어낸다. 고기를 조금 잘라 먹은 다음 달걀부침을 다시 덮는다. 노른자가 흥건한 상태로 익은 달걀부침에 칼을 댄다. 고기를 또 조금 잘라서 한 몸으로 만들어 먹는다. 종교 행사처럼 경건하다. 이쯤 되면 그의 직업이 궁금하다. 음식 평론가? <미쉐린 가이드> 별점 식당 투어족? 절대 미각의 미식가? 아니다.
그는 피아노 조율사다. 음이 흐트러진 피아노를 찾아 전국을 다닌다. 1시간 동안 피아노와 씨름하면 허기진다. 노동의 수고를 달랠 요량으로 고르고 고른 맛집에서 ‘혼밥’을 한다. 그러기를 30년 남짓. 노동은 그의 식도락 여행의 근사한 동반자다. 피아노 조율 과정과 ‘혼밥’ 한 식당 정보를 블로그 ‘퍄노조율사’에 올린 지도 10년이 넘었다. 지난해엔 <중국집>을, 올해는 <경양식집에서>를 출간했다. 블로그 내용에 반한 출판사들의 러브콜 덕분이다. 통상 먹거리 책 출간은 이름난 미식가나 음식 문화 연구자들, 문화계 유명 인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다. 보통 사람의 미식이 궁금하다. 그를 지난 12일 서울 중구에 있는 양식당 ‘그릴데미그라스’에서 만났다.
조영권씨가 ‘그릴데미그라스’의 함박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조영권씨가 ‘그릴데미그라스’의 함박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혼밥’ 식당으로 경양식집은 적당하지 않다는 이가 많은데, 아니다. 의외로 혼자 식사하는 이가 많다.” 그가 주로 가는 경양식집은 고급스럽거나 비싼 곳이 아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 등판한 고색창연한 노포(오래된 가게)가 대부분이다. 도톰하다 못해 두툼한 일식 돈가스를 파는 곳도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크게 만들려고 돼지고기를 두들기고 또 두드려 납작하게 만든 우리네 돈가스를 파는 식당이다.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는 외국에서 들어온 음식이지만, 이젠 한국화돼서 사실 한식이라고 봐야 한다.” 전국에 퍼져 있는 경양식집은 대략 300곳 정도라고 한다. “해마다 그 수가 줄어든다”며 “중요한 우리 음식 문화인데 안타깝다”고 그는 말한다.
경양식집은 ‘응팔’에 등장할 정도로 한때 유행했었다. 한자 그대로 ‘가벼운’ 양식인 돈가스, 함박스테이크와 수프, ‘사라다’(샐러드) 등을 파는 식당이다. 1970~80년대엔 특별한 날에만 찾는 고급 식당이었다.
조영권씨가 ‘그릴데미그라스’의 함박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언제부터 우리가 양식을 먹게 되었을까? 1800년대 후반이라고 한다. 당시 한 영국인이 제물포에 정박한 군함에 한국인을 초대해 유럽 음식을 대접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뒤 러시아공관에 머물면서 앙투아네트 손탁이 낸 양식을 통해 처음 접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양식당은 고관대작과 외국인이 모이는 사교장이었다. 주로 프랑스식 양식이었다. 그 당시 문 연 ‘서울역 그릴’이 아직 영업 중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양식은 미국식으로 바뀌었다. 재료가 주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고기였다. 오래된 경양식집이 유독 미군부대 근처에 많은 이유다. 경양식집은 1980년대 후반 패밀리레스토랑이 들어오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는다. 외식 시장에 먹거리가 다양해진 것도 한 이유였다.
조씨는 이유 하나를 더 꼽았다. “1980년대 냉동식품으로 만든 돈가스가 분식점 메뉴판에 올랐다. 2000~3000원이면 먹는데, 굳이 경양식집에 가 7000~8000원 내고 먹겠는가.” 분식점 돈가스엔 깍두기나 김치가 따라 나왔다. 최근 복고풍이 유행하면서 1970~80년대 경양식집을 본뜬 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 “맛도, (고기) 크기도 다르다. 완전히 다른 곳이다.” 흉내엔 ‘그 시대 경양식집의 영혼’이 없다는 소리다.
피이노 조율 도구 중 가벼운 것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그가 찾은 경양식집은 200곳이 넘는다.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처럼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을까.
“부산의 한 경양식집에 갔을 때다. 마침 도착한 시간이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인천에서 왔다고 하니 주인이 먹게 해줬다. 그가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호텔 양식부에서 일했다는 그는 사업을 시작해 한때 프랜차이즈만 40개 넘을 정도로 성공했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망해 거리에 나앉게 되자 요식업계 후배들이 식당을 마련해줬다고 했다. 이미 그 빚은 다 갚았다며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내려줬는데,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조씨는 그곳에서 한 남자의 인생을 마셨다. 자신의 처지도 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디지털 피아노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피아노 조율사가 설 곳은 줄고 있다. 다른 궁리도 할 법한데 그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30년 남짓 했지만, 여전히 즐겁다. 코로나19로 교회가 문 닫으면서(교회 피아노 수리는 꽤 짭짤한 일감이라고 한다) 지난해 수입도 많이 줄었는데, 이 일이 좋다. 건반에 몰입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최근 조영권씨가 출간한 책 <경양식집에서>.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그는 20살 때 보건전문대 입학을 앞두고 학업을 포기했다. “문과였는데, 적성에 안 맞았고 공부도 썩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대학 진학보다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악기가 좋았다. 피아노, 기타, 트롬본, 트럼펫, 바이올린, 플롯 등을 다 다뤄봤다. 하지만 연주자의 길은 관심이 없었다. 집안 형편도 음악을 전공하기에는 어림없었다. “여행을 좋아한다. 돌아다니는 게 즐겁다. (수리할) 악기가 (내게) 오는 게 아니라, 내가 찾아가야 하는 게 피아노 수리다.” 그는 학원과 매장에서 기술을 배웠다. “30년 남짓 출장 다니다 보니 경지에 올랐다.” 그가 웃었다. 서울이 고향인 그가 인천에 터를 잡은 것도 피아노 공장이 인천에 많아서다. 그의 애창곡은 빌리 조엘의 노래 ‘피아노맨’이고, 퇴근 뒤 피아노로 치는 곡도 <여명의 눈동자> 피아노 버전 오에스티(OST)다.
그의 피아노 사랑은 맹렬하다. 맛 여행은 더 집요하다. “어느 날 부산에서 연락이 왔다. 수리비는 10만원인데, 차비 등 생각하면 남는 장사가 아니었지만 갔다.” 수첩엔 간 김에 들를 경양식집 목록이 빼곡하게 적혔다. “조율을 마치자 주인이 내 책 <중국집>을 내밀며 사인해달라고 했다. 부끄럽고 뿌듯했다.” 10년 전 한 음대 대학생의 지하방에서 만난 피아노는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버려야 할 피아노였는데, 독학생이 안쓰러워 4시간 걸려 고쳤다.” 그의 출장엔 항상 ‘이야기’가 넘친다.
<경양식집에서>는 글과 만화로 구성되어 있다. 박미향 기자
조영권씨의 블로그 ‘퍄노조율사’ 화면. 블로그 화면 갈무리
그래서인지 영화사 몇곳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영화사 수박’과 ‘메가박스 플러스엠’이 공동 제작에 나섰다. ‘영화사 수박’은 <리틀 포레스트> 등을 제작한 영화사다. 그의 ‘피아노 출장과 맛’이 곧 시리즈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다.
“너무 엉망인 피아노의 음을 맞추는 일은 인생과 같다”는 그. 노인이 되면 음이 다 맞는 피아노처럼 인생도 완성에 이르게 될까. 그가 새 생명을 준 피아노만 1만대가 넘는다. 그의 피아노 인생엔 돈가스가 있다. 오늘도 그는 25㎏짜리 조율 공구 가방을 들고 떠난다. 봄 음식 맛볼 생각에 설렌다. 보통 사람의 미식엔 노동이 있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참고 서적 <우리 생활 100년·음식> <한국음식문화와 콘텐츠>
[ESC] 이곳을 추천합니다 ‘맛있는 경양식집’
200개가 넘는 경양식집에서 ‘혼밥’한 조영권씨. 함박스테이크, 돈가스 등 차림표에 적힌 음식 이름은 같아도 경양식집마다 맛은 다르다. 같은 밥집이라도 그날그날 조리사의 컨디션에 따라 밥맛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밥집이 이러할진대, 메뉴가 더 다양한 경양식집은 오죽할까. ‘혼밥’ 30년 남짓 인생 조씨가 엄지척하는 경양식집을 소개한다. 추억 새겨 넣기에 이만한 곳도 없어 보인다.
◆ 추억 돋는 ‘예전’
“직접 만드는 빵도 맛있고, 스테이크가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좋다.” 인천광역시 월미도에 있는 ‘예전’은 30여년 전 문 연 곳으로, 인테리어나 가구가 예전에 비해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조씨는 “20여년 전 결혼을 앞두고 아내와 자주 간 곳”이라며 “처음 향수병을 아내에게 선물한 곳이라서 추억이 많다”고 말한다.(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문화로 43-2/032-772-2256/돈가스 1만4000원, 스테이크 오후 4시 이전 3만3000원·이후 3만7000원 등)
◆ 넉넉한 ‘라임하우스’
“호텔 양식당 요리사 출신의 주인과 그의 아내가 운영하며 정통(?) 한국식 경양식 맛을 선보이는 곳이다.” 한 접시 안에 3가지 반찬과 소담한 밥이 올라간 돈가스는 크기가 납작하고 크다.(경기도 광명시 오리로 887 보보스텔 205호/02-2612-2126/돈가스 정식 1만5000원, 라임 정식 A 2만2000원, 라임 정식 B 1만9000원 등)
◆ 고구마돈가스라니~‘새나드리’
“돈가스에 들기름으로 볶은 김치를 올려주는 곳인데, 메뉴 중 ‘고구마김치돈까스’는 고기 안에 고구마무스를 넣어 맛이 독특하다.”(충북 음성군 금왕읍 응천서길41/043-878-0650/‘고구마김치돈까스’ 1만3000원 등)
◆ 바닷바람 쐬며 돈가스 한 점, 삼척 ‘세모레스토랑’
“딸들과 함께 동해로 겨울여행 갔을 때 방문했던 곳이라서 추억이 많다. 삼척에는 문 연 지 30년 이상 된 경양식집이 두곳 있는데, 그중 가성비 좋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강원도 삼척시 중앙로 230/033-573-4420/세모정식 1만2000원 등)
경양식집 ‘그릴데미그라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 서울의 강자, ‘그릴데미그라스’
“고기뿐만 아니라 식재료가 좋다. 실내 풍경도 단아하고, 언제나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서울특별시 중구 삼일대로2길 50 오리엔스&레지던스 1층/02-723-1233/함박스테이크 2만원 등)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