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시쳇말이 있죠. 지역에 따라 “거시기하다” “있다~ 아이가” 정도의 ‘찰떡’ 소통어도 있지요. 판교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그런 말이 관찰됩니다. 여기저기서 대규모 채용의 문이 열리는 봄이 왔으니, 다른 산업군에서 이직해 오는 경력자들과 예비 신입사원들을 위해 ‘판교의 다의어 사전’을 꺼내보려고 해요.
우선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풀 스택’(full-stack)이라는 표현인데요, 본래 웹 환경에서 시제품 출시를 위해 필요한 지식을 고루 갖춘 사람을 ‘풀 스택 개발자’라고 부르면서 널리 퍼졌다죠. 국내에선 서버 기술부터 서비스 화면까지, 모든 것을 다 다루는 전지전능한 개발자라는 뜻으로 왜곡되어 쓰입니다. 판교에서는 개발자가 아니라도 ‘만능인’의 의미로 통용됩니다. “그분, 채용부터 급여, 인재교육, 평가까지 모두 할 수 있는 인사 쪽 ‘풀 스택’이죠.” “자금과 아이아르(IR), 회계와 세무까지 다 할 수 있는 ‘풀 스택’ 재경 인력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런 말을 해도 어색함이 없습니다.
‘엔드 단’이라는 표현도 참 묘하죠. ‘단’(端)이라는 한자가 끝을 의미하는데, 영어 동의어인 ‘엔드’(end)가 함께 쓰입니다. 마치 역전앞, 약수 물, 초가집 같은 의미 중복 표현이죠. 추측건대 개발 분야를 나누는 ‘프런트엔드-백엔드’라는 표현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그런 분위기에서 파생된 게 아닐까 싶어요. 판교에서는 ‘최종’ 혹은 ‘접점’을 의미하는 데 두루 쓰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의사 결정 제일 ‘엔드 단’에 누가 있죠?”나 “‘엔드 단’에서 사용자들과 소통하는 창구는 여기에 두시죠”라는 문장은 꽤 자연스럽네요. 글자 그대로 맨 뒤쪽을 표현할 때도 ‘엔드 단’이라고 해봅니다. “재택근무 동안 살이 좀 쪄서 허리띠 ‘엔드 단’ 구멍을 쓰기 버거워졌다.” 방금 억지로 만들어낸 문장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동료들에게 말했을 때 다들 잘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응용 표현으로 ‘프런트 단’이 있는데요, 업무적으로는 사용자들에게 노출되는 화면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맨 앞쪽 혹은 제일 처음 순서, 첫인상 등을 칭할 때 두루 쓸 수 있죠. 예를 들면 “우리 회사는 ‘프런트 단’에서 대학생이 취업하고 싶은 1위 기업으로 꼽히지만, 경력직들 사이에서 위상은 그렇지 못하다”고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이직해 왔을 때를 떠올려보니 ‘이슈’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무궁무진해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사전적으로는 ‘핵심이 되는 문제점’이나 ‘화젯거리’ 정도 의미일 테죠. 아이티(IT)업계나 판교에선 얘기 나누고자 하는 거의 모든 주제를 이슈라고 칭하는 게 일상이더라고요. “안드로이드 오에스(OS)에서 화면 구현이 느린 이슈”, “디자인팀에서 소재 선정을 완료하지 못한 이슈” 같은 표현은 쟁점이 첨예한 상황을 표현하는 게 아닙니다. 현재 상황을 담백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죠. 첫 출근 후 참석한 회의가 마무리되는 자리에서 주최자가 “혹시 보탤 의견이나 말씀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나요?”라고 묻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이슈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순식간에 토착민 같은 아우라를 풍길 수 있어요. 문제 있다고 표현하기엔 부정적일 것 같고, 일이 좀 있다고 하면 느낌이 살지 않을 때 “이슈 있다”고 하시면 됩니다.
‘애자일(agile)하다’라는 표현도 여러 맥락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래 개발자 집단이 거창한 계획보다는 기민한 상호작용과 협업에 의지해 예상 못 한 상황에 대응하며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인데요, 일각에서는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내내 분주한 모든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2분기 계획은 뭔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프런트 단부터 엔드 단까지 애자일하게 이슈 대응하겠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속뜻은 ‘계획이 없지만 무계획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다’ 혹은 ‘의사 결정이 쉽게 뒤집힌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달달 볶아댄다는 뜻도 있겠네요. 범국민적 관심사로 예문을 만들어보자면 “부동산 정책은 최근 몇 년간 매우 애자일하게 나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잇(IT)문계(판교 아이티 기업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