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아팠다. 원고 마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중에 속이 탈이 났고, 사흘째 금식을 해야 할 정도로 증세가 심했다. 그러면서 생애 처음으로 한 일이 있는데, 마감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작가들은 종종 원고 펑크를 낸다. 도저히 쓸 수 없을 때, 이걸 발표하느니 차라리 불성실이나 신의 없음을 지탄받는 편이 낫다 싶을 때 원고를 보내지 못한다. 내 경우는 적어도 소설 작품에 대해서는 그런 선택을 한 적이 없으나 이번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단편들도 연내에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계절과 달이 바뀔 때마다 그 무렵 발표해야 할 작품들을 중심으로 삶의 사이클이 흘러온 내게는 일종의 결단이었다.
‘식물 집사’의 컨디션이 어떻든 집 안 식물들은 자기만의 스케줄대로 삶을 꾸려 나갔다. 발코니가 좁아진 터라 다들 실내 생활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는 사뭇 다양하다. 일단 아예 다른 집으로 입양을 간 식물들이 있다. 마침 새집을 사서 이사를 한 시어머님께 보낸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 명의의 집을 마련한 어머니와 우리는 이사하던 날 기대에 찬 흥분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것은 몇 해 전 혼자가 되신 어머님이 일을 다니며 이룬 성취이기도 했고, 남편과 내가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결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처음 집을 알아볼 때부터 함께 다녔던 이모들의 기쁨은 더했는데, 어머님을 비롯해 그 세자매가 이삿날 나란히 서서 이제 떠나게 된 옛집과 고심해서 고른 새집을 지켜보는 광경은 언제 떠올려도 좋은 것이었다. 그런 새집으로 갈 화분들이니 고심해서 고를 수밖에 없었다. 잎 색이 화려한 아이스톤 크로톤, 굵은 잎맥이 멋진 스파티필름, 잎 사이로 붉은 꽃이 소복하게 난 칼리스테몬(병솔나무), 그리고 흰 꽃 게발선인장. 2년 가까이 기른 게발선인장을 보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시댁에는 화분이 무척 많았다. 처음 가본 남편의 집에는 입구에서부터 크고 작은 화분이 층층이 놓여 있었고, 고무호스로 물을 주고 있는 아버님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첫 만남이었다. 20대 때 남편과 나는 똑같은 화분을 사서 나눠 가진 적이 있는데, 아마도 아몬드 페페라는 식물이었을 것이다. 나는 회사 사무실에서 기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별로 보내버렸지만, 자기 집에 가져간 남편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화분을 길렀다. 나중에 보니 그건 모두 ‘그린 핑거스’였던 아버님 덕분이었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가족이라는 제도 안으로 서로가 들어오고 각자 몫의 삶을 또 살아내는 동안 정말 많은 것이. 어머님께 “그 많던 화분들은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은 때는 아마도 설날이었을 것이다. 두분은 제주도로 이주하셨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님 혼자 인천으로 돌아오셨다. 제주에 있을 때만 해도 선인장이며 산세베리아며 하는 화분들이 잘 자라고 있었는데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아마도 제주에 있는 가족에게 주고 오셨겠지 싶어서 그동안은 물어볼 생각을 못 했지만, 그렇다 해도 화분이 하나도 없다는 건 이상했다. 어머님은 동네 아는 사람을 통해 화원에 팔았다고 했다. 말이 판 것이지 원래 심겨 있던 도자기 화분값도 안 되는 돈이었다.
“그런데 내가 게발선인장은 꼭 가져오고 싶었어. 풍성하게 자라서 꽃도 예쁘고. 그래서 제주에서 인천으로 이삿짐 옮길 때 신신당부했거든. 화분 깨뜨리지 말고 꼭 갖다 달라고. 그런데 나중에 이삿짐이 왔는데 게발선인장이 없는 거야. 연락했더니 깨져서 아예 배에 안 실었다고, 얼마나 아까운지.”
어머님은 정말 화분이 깨진 것인지 아닌지 아직도 의문을 가지고 계신 듯했다. 혹시 누가 게발선인장의 그 멋있는 모습에 그냥 가져가 버린 건 아닌지. 그때야 나는 평생 함께 산 사람을 잃고 그의 흔적을 자의든, 타의든, 지워나가야 했을 어머님의 몇 해가 실감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화분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 어머님 집이.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 게발선인장이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일단은 내게도 게발선인장 화분이 있었다. 좀 외진 곳에서 기르기는 했지만, 겨울 즈음이 되자 흰 꽃을 무더기로 피워 나를 환호하게 했던 식물이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흰 꽃 게발선인장을 새집으로 보냈다.
그 뒤 인천으로부터는 많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모님들까지 구경을 와서 보고 난 결과였다. 식물이 들어오니 집이 확 산다, 식물들이 모두 특이하게(?) 생겼다, 이게 다 비싼 식물들이라는 약간의 오해까지. 어머님은 예상대로 게발선인장을 가장 반겼다. 그리고 내가 그리 튼튼하게 기르지 못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선인장을 단단하게 길렀느냐는 인사를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어쩌면 모양이 그리 근사하지는 못했어도 어쩌면 내가 정말 단단하게 잘 길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머님이 큼지막한 화분대를 마련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가격도 꽤 나가는데다가 아주 튼튼해서 몇 개의 화분을 더 올려놓을 수 있다고. 혹시 발코니에 있지 못해 상태가 나빠진 식물들이 있으면 더 보내도 된다고. 나는 어머님이 새로운 삶의 사이클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발코니에는 이상한 말이지만 조금 시든 식물만이 남아 있다. 그런 최적의 환경은 당장 어려움을 겪는 화분들의 차지이고, 나머지는 식물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은 빛, 공기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물을 주는 것이지만 그 역시 성장이 원활할 때야 필요한 게 되는 것이다. 그사이에도 나는 욕심을 부려 상태가 좋지 않은 소코라코를 살릴 셈으로 뿌리를 잘 내게 해준다는 흙으로 분갈이를 해주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화가 돼 완전히 노랗게 시들어버렸다. 과한 마음이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균형마저 깨뜨린다는 것. 여러 번의 실수 끝에도 아직 나는 식물들이 보여주고 있는 삶의 원칙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병원에 다니던 날들의 끝에는 화원으로 가드닝 수업을 받으러 가야 했다. 밥을 먹지 못해 컨디션이 나빴지만, 예약금 때문이라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근처에 와있던 후배와 잠깐 차를 마시기로 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지, 모처럼 밖으로 나와 그런지, 대화를 따라가기가 영 힘들었다. 끼니가 이렇게 중요하다니. 나는 차도 넘길 수 없어서 생수를 한 병 시켜 들고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내 근황을 들은 후배는 “선배, 새로운 사람이 되려나 봐요” 하고 덕담을 해주었다. “그런가? 혹시 에라 모르겠다, 이런 거 아닌가?” 내가 설핏 웃으며 말하자 “에이, 아니에요” 하고 후배는 두 손을 열심히 저었다. 나는 무언가 안심이 된다고 생각했고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는 후배에게 좋은 일이 많기를 바랐다.
화원은 일반적인 가드닝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식물을 마치 조형물처럼 다듬어 기르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일단 분재용 흙에 동백나무를 옮겨 심고, 강사와 나는 그것을 좀 멀찍이 바라보면서 이 나무의 ‘빈 곳’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했다. 오늘의 가드닝 수업조차 만만한 일이 아니라 온통 마음을 써야 하는 일이구나. 마침 체력이 달리던 차라 낭패감이 들었지만, 곧 수업에 집중하게 되었다. 일단 나무를 보면서 어떤 방향으로 만들고 싶은지 큰 그림을 그려라, 그리고 차근차근 빈 곳을 만들어 나무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만들어라.
“자, 어디를 가장 먼저 손대고 싶으세요?”
동백나무 앞에서 강사가 물었다. 나는 가지와 잎들이 가장 조밀하게 ‘뭉쳐 있는’ 부분을 가리키며 저기부터 손을 봐야겠다고 했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자면 거기가 제일 문제처럼 보였으니까. 강사는 “음, 그것도 좋지만 일단 다른 부분부터 해결해보면 어떨까요?” 하더니 다른 가지들을 가리켰다. 그 이유는 수업의 마지막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동백나무를 보면서 느낀 이 아름다움, 그러니까 가지가 특정 모양으로 휘고 솟고 뻗고 하는 이 세세한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뭉쳐져 있는 바로 그 부분의 대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밀도가 높은 일상이 지난 뒤에야 휴식이 특별해지듯이.
수업을 마치고 나는 원고들을 반려한 것, 어쩌면 내게 일어난 건 그뿐인데도 마음의 변화는 적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멈췄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중단이나 종료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위만 잠시 둘러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모든 넘어지는 것들은 다시 걷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는 것을. 그러니 괜찮은 봄일 거라고, 나는 최대한 고심해서 여백을 만든 동백을 들고 집에 오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김금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