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나 바쁜지 약속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세계적인 영화 제작자와 우연히 같은 엘리베이터에 탄다면? 마침 세상에 둘도 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난 직후에 말이다. 물론 듣는 사람에게도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이제부터 확인해볼 일.
시간이 없다. 3분, 아니면 4분? 이 짧은 동안 듣는 쪽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아이디어를 더 듣고 싶군요. 내 사무실로 가시죠. 비서, 다음 일정을 취소해주게.” 엘리베이터가 멈추기 전에 이렇게 말하게 할 수 있을까?
사실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세계적인 영화 제작자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탈 일이 자주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아이디어가 괜찮은지 알아보는 일이 3~4분이나 잡아먹지 않는다. 사실은 1분도 안 걸린다. 처음 보는 제작자가 아니라 오래 알고 지낸 편집자나 창작 쪽 일을 하지 않는 이웃집 중학생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참신하다고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그저 그랬다는 것이 밝혀져, 듣는 사람의 긴장이 ‘탁’하고 풀리며 표정이 어색해지는 데에는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
길고 긴 이야기를 3~4분 안에 설명하는 일을 피칭이라고 부른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쓰는 용어라고 한다. 다 쓴 시나리오를 제작사에 팔 때나 완성된 영화나 드라마를 관객에게 권할 때, 피칭은 요긴하다.
완성한 작품을 다듬는 과정에도 피칭은 쓸모가 있다. 브루스 조엘 루빈의 예를 보자. 영화사 간부들 앞에서 피칭할 기회를 잡았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그런데 루빈은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차렸다. “말하다 보면 어디에서 그들의 관심이 사라지는지, 그들의 시선이 흐릿해지는지 알 수 있었다.”
루빈은 이 깨달음을 창작에 이용했다. “설명할 때마다 어느 부분에서 (듣는 사람의) 관심이 식어버리는지 발견하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의 시선이 떠나갈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 부분을 수정하곤 했다.” 이야기의 재미없는 부분이 하나하나 사라졌다. 퇴짜 맞고 글을 고치고, 퇴짜 맞고 글을 고치고, 마침내 루빈은 파라마운트 영화사에서 피칭을 했다. 짧은 발표를 마쳤을 때 영화사 간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만들게 된 영화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사랑과 영혼〉이다.
지난 칼럼에 나는 “사업에 돈과 노력을 쏟아붓기 전에 검증부터 해야 한다, 아이디어 단계에서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남에게 물어야 한다”는 알베르토 사보이아의 생각을 소개했다. 피칭은 영화 제작에 돈을 쏟아붓기에 앞서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개인 창작자는 사정이 다르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써내려가는 일 역시 개인 창작자는 부담스럽다.
이럴 때도 피칭은 요긴하다. 이야기를 끝까지 쓴 다음이 아니라, 아직 한 줄도 쓰지 않은 때부터 피칭을 해보면 어떨까. 블레이크 스나이더는 이렇게 썼다. “나는 새로운 작품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 (영화 쪽 일을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상담한다. 말하면서 그들의 눈빛을 유심히 본다. 지루할 때 그들은 눈길을 딴 곳에 둔다. 나는 다음 사람에게 피칭하러 가기 전에 그 부분을 먼저 고친다.” 사실은 나도 만화를 그리기 전에 늘 이렇게 한다. 이 방법을 나는 시나리오 작가 심산 선생에게 배웠다. 작가들 대부분이 이미 이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독자님도 꼭 해보시길.
김태권(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