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이고 개방적이다. 빠르고 유연하며 젊다. 아이티 기업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들이죠. 고정관념이 형성된 여러 이유가 있을 텐데요. 전통 기업들보다 직원 평균 연령대가 낮다는 점이 큰 요인일 것 같아요. 생물학적으로 어리다는 것은 싱싱함과 활동력, 순수함 같은 걸 상징하잖아요. 제가 다니는 회사만 해도 1990년대 후반에 태어난 분들을 흔히 볼 수 있고, 40대 초중반 정도면 ‘시니어’로 분류됩니다. 회사 안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때로는 대학 캠퍼스 같은 느낌이 들 정도죠.
하지만 젊다고 해서 모두가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혁신적이진 않습니다. 일정 수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예외가 나타나기 마련이니까요. 거기에 더해 회사가 급성장하며 날로 영향력을 더해간다면, 경험이나 역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관리자가 된 사람들이 많아지죠. ‘낙하산’ 타고 내려오신 분들도 간혹 생기고요. 이들 교집합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면 ‘젊꼰’, 즉 젊은 꼰대가 등장하기 좋은 환경이 됩니다. 주변에서 보고 느낀 사례들은 이렇습니다.
첫째, “레퍼런스(Reference)는 뭔가요?”를 입에 달고 사는 경우예요. 우리말로 ‘참조 사항’ 정도 되는 게 레퍼런스인데요. 일을 도모할 때 선행 사례가 꼭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경우죠. 나쁘게 말하면 일정 부분 모방할 대상이 없으면 일을 못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들을 설득하기 무척 수월한 경우도 있습니다. ‘FAANG(페이스북·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을 칭하는 약어)쪽 요즘 추세는 이런 식이라고 하니 조금 보완해서 우리는 이렇게 해보자’는 식의 논리를 앞세울 때입니다. 우리 현실에 맞춰 치열한 고민을 한 것보다, 북미의 잘 나가는 회사들을 오매불망 추종할 때면 한숨이 절로 나오죠. 업력이 긴 회사에 다니던 시절, “삼성은 요즘 어떻게 한대?”를 입에 달고 살던 임원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하네요.
둘째, 목업(mock-up) 만들기가 일상화된 경우입니다. 목업은 실물 형태의 모형을 뜻하는데요. 인터넷 업계에서는 실제 구동되는 서비스처럼 제작한 제품이나 디자인을 통칭합니다. 빠르게 시도해보는 아이티 회사라면 초기 기획 단계에서 목업 제작에 드는 노력을 최소화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럴 시간에 가치 있는 일을 더 해보자는 논리가 힘을 얻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기업처럼 변해버린 회사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예전 같으면 간단한 개념 스케치를 통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쉽게 합의하며 넘어갔을 일들이, 당장 출시해도 될 만큼 완성도를 높인 목업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바뀝니다. 표면적으로는 경영진이 쉽게 이해한다는 이유에서인데요, 속을 들여다보면 어떻게든 눈도장을 더 받고 싶은 조직장의 무리수인 경우가 많죠. 반짝이는 아이디어보다 화려하게 분칠한 키노트가 의사결정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걸 볼 때면, ‘여기를 혁신 기업으로 불려도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마지막으로 ‘힙(Hip) 지상주의’입니다. 격식 없는 히피 같다는 뜻에서 파생된 게 ‘힙’이라는 표현이라죠? 판교와 분당 일대에서 정말 많이 듣는 말이 “힙 하다”, “그거 힙 하냐?”입니다. 유행을 선도하는 업계라는 일종의 자존심이나 강박감이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서비스가 젊은 이용자층을 향하고 있으니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딱히 그럴 필요 없는 상황에 ‘힙’을 내세우는 경우도 있죠. 이럴 때면 장소나 상황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어색한 결과물이 도출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 모든 상황이 한꺼번에 발생할 때도 있습니다. 레퍼런스나 목업 없이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분들이 ‘습관성 힙’을 부르짖을 때죠. 딱히 필요 없는 일을 많은 사람이 긴 시간 공들여 하는 것만큼 슬픈 상황이 또 있을까요?
테헤란로를 거쳐 판교까지, 한국의 인터넷 서비스 기업들의 역사가 30년에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직접 몸담아보면 예상치 못했던 독특한 고리타분함이 존재하는 업계이기도 합니다. 판교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젊은 이미지를 계속 가져갈 수 있을까요? 실제로 혁신적이고 개방적이며 빠르고 유연하다면 앞으로도 문제없겠죠.
잇문계(판교 아이티기업 회사원)